
1. 여자와 남자가 만난다.
2. 여자와 남자가 사랑에 빠진다.
3. 여자와 남자가 헤어진다.
그리고 4. 그저 결말이 해피 엔딩이냐, 새드 엔딩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미리 말하자면 [체실 비치에서]의 결말은 새드이다. 그런 맥락에서 일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다른 주제, 다른 이야기, 다른 분위기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에서 언뜻언뜻 스쳐 지나가는 [라라랜드]의 환영을 보았다. 순서대로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1. 여자와 남자가 만난다.?
[라라랜드] 가난한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과 배우 지망생 미아(엠마 스톤)가 만나다.
[체실 비치에서]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는 플로렌스(시얼샤 로넌)와 열정 넘치는 사학생 에드워드(빌리 하울)가 만나다.
모든 로맨스 영화의 시작이 그러하듯 젊고 반짝반짝 빛나는,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각기의 아픔과 사연을 지닌 두 남녀가 우연히 또는 필연히 맞부딪힌다. 반복된 악연 속에서 싹튼 미아와 세바스찬의 사랑에 비해 그야말로 '한눈에 반한' 플로렌스와 에드워드의 시작은 훨씬 순조로웠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두 사람이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대화, 일련의 크고 작은 사건들, 공감과 유대- 이해와 연민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특별한 것으로 인식하고 마음을 열어 가는 과정은 언제나 동일하다.

2. 여자와 남자가 사랑에 빠진다.
[라라랜드]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미아와 세바스찬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꾼다.
[체실 비치에서]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플로렌스와 에드워드는 결혼을 결심한다.
둘은 곧 로미오와 줄리엣을 방불케 하는 뜨겁고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사랑은 그들을 무모하고, 유치하고, 안달 나게 만들어 지켜보는 관객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띠운다. 이 구간에서 많은 이들은 지나간 풋풋했던 첫사랑 혹은 묵묵히 팝콘만 먹고 있는 옆자리 연인의 사뭇 달랐던 초기 시절을 떠올릴 것이다. 여하튼 불안한 미래 앞에 무한한 가능성으로 빛나는, 아름답고 불완전한 네 명의 청년들은 자신의 앞에 다시없을 행운으로 다가온 서로를 몸과 마음을 바쳐 오롯이 사랑한다.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삶 속에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존재하는 상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가기 시작한다. 당신과 나, 사랑에 빠진 모든 평범한 연인들이 그러하듯.?



[체실 비치에서]의 결말에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결별 후, 에드워드가 플로렌스의 연주회를 찾아가기 때문이다. 둘이 함께하던 시절 플로렌스가 꿈꾸던 대로, 그녀의 현악 4중주단은 크게 성공한다. 오직 에드워드만을 위해 모차르트의 선율을 연주하겠다던 플로렌스. 노인이 된 에드워드는 약속했던 자리에 앉아 백발이 된 플로렌스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몇십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눈에 그를 알아본 플로렌스의 볼에도 눈물이 떨어진다. 분명 [라라랜드]와 흡사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이 커플의 눈물이 주는 의미는 앞선 커플과 큰 차이가 있다. 연주회에 찾아온 에드워드는 플로렌스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 슬하에 많은 자식과 손녀를 두고 꿈과 사랑 모두를 이뤄냈음을 안다. 그녀와 헤어진 이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채 투명인간처럼 허송세월을 살아온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말이다. 때문에 그의 눈물은 아쉬움과 미련, 회환, 후회가 뒤섞여 주름 진 얼굴을 얼룩지게 만든다.
만남부터 이별, 영원한 헤어짐까지 동일한 흐름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라랜드]의 결말이 [체실 비치에서]의 결말과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두 커플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는 그들의 관계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둘은 서로의 솔직한 감정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지도, 타협점을 찾으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저 사랑의 환상 속에 숨어 서로의 귀엽고 예쁜 모습만 찾기에 급급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환상이 아닌 지독한 현실, 결혼에 안착했을 때 찾아온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자존심과 수치심은 체실 비치 자갈밭 위에 내려놓고 둘이 깊은 마음속 이야기를 터 놓았다면 어땠을까? 미아와 세바스찬이 그러했듯 말이다.
물론 세바스찬과 미아 커플이 많은 싸움과 화해, 설득과 타협 끝에 내린 결정 역시 이별이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과정이 헛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끝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은 아플지언정 그래 우린 여기까지야, 할 만큼 했다. 인정하고 웃으며 서로를 좋은 마음으로 떠나보내는 것이 가능했다.
서글픈 미소 뒤 회환으로 얼룩진 늙은 에드워드의 얼굴에 많은 것들이 담겨있었다. 인간이기에 저지를 수 있는 실수, 지나고 보면 선명하지만 당시에는 알 수 없는 선택의 순간, 아무리 후회하더라도 다시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들..
길고 긴 리뷰 끝 하고 싶은 단 한마디는 결국 이것이다. 영화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언제나 최선을 다한 관계에는 미련이 남지 않는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한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받았던 깊은 상처를 플로렌스가 에드워드에게 털어놓았다면? 에드워드는 그 상처마저 사랑했을지 모른다. 그녀가 그의 아픈 어머니를 감싸 안았듯이. 에드워드가 본인이 무시당했다는 모멸감에만 집중하지 않고 플로렌스를 더 배려해주었다면? 분명 플로렌스의 다음 남편은 그러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섹스를 병적으로 두려워하는 이유를 알든 알지 못하든 묵묵히 기다려 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었을 때, 끔찍한 기억과 성에 대한 무지함이 버무려져 탄생한 트라우마는 자연스레 극복되었을 것이다. 플로렌스를 꼭 빼닮은 사랑스러운 딸을 본 에드워드의 머릿 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떠올랐을까. 아, 치유가 가능한 거였구나. 어쩌면 내가 바꿀 수도 있었던 거구나. 그리하여 내 사람과 마음껏 사랑을 나누고, 서로를 반반 닮은 아이들을 낳고, 꽃다발을 들고 연주회에 찾아가며- 지금 그녀의 남편이 누리고 있을 유복하고 평화로운 삶이 내 것일 수도 있었겠구나. 한 순간의 치기와 분노로 모든 걸 망쳐버렸구나. 에드워드는 자신의 일생이 부정당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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