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해류>는 엄태선 작가의 단상집으로, 그가 살아오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짧은 문장으로 엮어 만든 책이다.
책은 손에 잡히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그리느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결국 혼란한 감정에 지쳐버려 무기력해지기까지의 과정이 담겨있다. 그 과정에서 좌절을 맛보기도, 때로는 희망을 얻기도 한다.
작가는 말한다.
"지나버린 과거의 불확실한 미래 사이에 놓인 현재의 우리는 필연적으로 '불안'이라는 감정과 자주 마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실패가 두려워 머뭇대다가 끝맺지 못한 채 사라진 꿈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방황 속에서 처음으로 이룬 저의 꿈입니다."
엄태선 작가의 단상집 <해류>는 독자들에게 위로와 공감이 되어주고 지난날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해줄 것이다.

저자 소개
저자: 엄태선
학창시절 내내 국어 과목을 좋아하여 자연스럽게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지만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모든 책과 멀어졌다.
대학이 최종 목표였던 나는 스물네 살이 되어서야 자신이 처한 위치를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고, 다시 꿈을 찾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 후 4년 간의 방황 끝에 겨우 마주한 꿈의 결과물이다. 이제야 제대로 졸업하는 기분이다.
목차
들어가며 6
1부 나는 자라서
열여덟 17 / 선명해지는 기억 18 / 마지막 학기 19 / 이 시대의 방황 20 / 이방인 21 / 망각 22 / 무제 1 23 / 상한선 24 / 변수 25 / 아카시아 26 / 무제 2 27 / 달 28 / 무제 3 30 / 긴 악몽 31 / 고3 32 / 징크스 34 / 덧난 상처 36 / 그늘 37 / 무제 4 38 / 행복의 의무감 39 / 졸업 40 / 사춘기 42 / 고래 43
2부 Arabesque
근시안 49 / 무제 5 50 / 관계 51 / 무제 6 52 / 스물 53 /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54 / 무제 7 55 / 확실한 영원 56 / 아이러니 57 / 12월 58 / 불확실성을 견디는 일 59 / 바다 60 / 무제 8 61 / 영원 62 / 동정 63
3부 다시 돌아온 우리의 겨울을 마주하며
장마 67 / 8100 68 / 스물일곱 69 / 연말 70 / 다짐 71 / 원하는 것 72 / 찰나 73 / 10월 74 / 황홀경 75 / 척 76 / 올바른 성장 77 / 무제 9 78 / 무제 10 79 / 무제 11 80 / 밑 빠진 독 81 / 인스턴트 과거 82 / 무제 12 83 / 할아버지와 목련 84 / 열병 86 / 부재 87 / 무제 13 88 / 불편함을 견디는 일 89 / 뒤엉킨 기억 90 / 무제 14 91 / 따뜻한 겨울 92 / 무제 15 93
별책부록
하나 97 / 둘 98 / 셋 99 / 넷 100 / 다섯 101 / 여섯 102
본문
나는 창가 자리, 뒤에서 두 번째 자리였다. 학창시절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자리였는데 거기에는 손에 꼽을 수 있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쉬는 시간에 창가 쪽으로 의자를 돌려 앉아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기 좋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야자 시간에 몰래 창문으로 넘어가 인공위성인지 별인지 모를 것들을 바라보며 노래를 들을 때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이것이 나의 전부였다.
- '열여덟' 중에서 -
어느덧 시간이 흘러 대학교 졸업의 문턱에 서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시간이 저물어 간다. 이 애매한 경계선에서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다. 근래 흐르는 공기는 분명 낯설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친구들이 하루빨리 성인이 되고 싶다 할 때도 나는 늘 학생인 게 좋았다. 학생이라는 신분이 어느 정도 제한이 가해지는 위치긴 하지만 그 덕에 보호의 울타리 안에 속할 수 있고, 나의 부도덕함이나 미숙함의 변명으로도 종종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일찍 깨달아버린 탓에 더욱 신분에 안주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나에게 대학교 졸업이란 그저 사회로 방출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스물다섯 살의 나에게 주어진 책임들이 벌써 묵직하게 느껴지기 때문일까. 각종 매체에서 사회초년생들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을 쏟아내기 때문일까. 아직 내가 진정한 의미의 어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이러한 의문들이 하루가 갈수록 점점 더 늘어만 가지만 졸업식 당일 날에 와서도 시원하게 풀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단단해졌으면 한다. 그것뿐이다. 정말 그것뿐이다.
- '졸업' 중에서 -
다들 사춘기 때 자신의 자아정체성을 두고서 혼란을 겪는다고들 하던데 나는 아무리 되돌아보아도 공부가 싫었던 것 외에는 기억나지 않는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도 앞으로 만나게 될 새로운 환경의 두려움이 전부였다. 정신을 차린 후로는 매일 졸업하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지가 그렇게 중요할까. 왜 그렇게 내 존재에 당위성을 부여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 '사춘기' 중에서 -
내 태몽은 고래라고 했다. 그것도 한강에 나타난 고래. 어릴 적에는 왜 다른 여자애들처럼 사과나 꽃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불만 아닌 불만을 가졌던 것 같다.
그 태몽에서부터 비롯된 걸까. 늘 남자애 같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목소리도 낮고, 하는 행동도 여자애답지 않다며 모두 한소리를 했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부터 그런 성격을 타고난 건 아니었다. 유치원을 다닐 적에 성격이 유별난 친구에게 친구라는 명목하에 괴롭힘을 당했었고 그 모습을 보던 아빠가 일방적인 괴롭힘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할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그 덕분에 조금씩 소소한 성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만큼의 강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을 뿐인데 여자답지 않다는 이야기는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나조차도 점점 스스로를 별난 애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딘가 딱딱하고 중성적인 이름도 별로였고, 유난히 낮은 목소리도 싫었다.
그런데 몇 년 새에 내 이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 태몽도 좋아졌고, 낮은 목소리도 싫지 않았다. 늘 여성스럽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고 큰 내가 더 이상 돌연변이가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젠 여성스럽게 행동하라는 말을 들으면 멋쩍은 웃음을 짓지 않고 "여성스러운 게 뭔데?"라고 되물을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는 내 사주가 여자라서 불리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여자가 드세서 자꾸 판을 깨려한다며 나무랐다. 나를 비롯한 모든 여자들은 여자라는 성별로 분류되기 이전에 사람이 아니었던가. 사람은 남녀노소를 떠나서 평등해야 한다고 유치원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는데 정작 어른이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더 이상은 이분법적인 사고에 나를 규정하고 묶어두지 않으려 한다. 엄마와 아빠가 걷던 한강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고래였다는 내 태몽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보려 한다. 그리고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다.
- '고래' 중에서 -
내가 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늘 무엇인가를 덜어내고 싶었다. 흠 잡을 곳 없이 무난하고 덤덤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걸 멋이라고 생각했을까. 자기 감정을 인정하지 않으면서까지 뭘 그렇게 따라하려고 했을까.
-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중에서 -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섣불리 넘겨짚지 말아야 한다. 그 사실을 매번 잊을 즈음에 다시 되새긴다. 소중한 모든 것이 내가 그린 미래에 늘 존재할 수는 없다.
- '무제 7' 중에서 -
늘 확실한 것을 원했고 그런 주제에 변질될 모든 것에 목을 맸다. 확실한 믿음, 확실한 사랑, 확실한 감정, 확실한 헌신, 확실한 미래와 같은 것들. 내가 바란 것은 불변성에 가까웠고 그럴수록 가변성에 집착했다. 코끼리를 떠올리지 말라 할수록 코끼리 생각에 빠져드는 일처럼. 이런 대책 없고 뜬구름 잡는 생각들이 갈수록 마음만 공허하게 만든다.
- '확실한 영원' 중에서 -
인간은 변화무쌍한 삶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한결같이 안정적일 수는 없다.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불행도 없다. 조금 더 기쁜 날, 조금 더 힘든 날이 반복되면서 이것을 이겨낼 힘을 조금씩 기르게 된다. 그렇지만 매번 새로운 타격에는 힘이 든다. 우습게도 내가 기른 힘만큼의 힘듦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 '아이러니'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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