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水記], 그리고 5년이란 시간을 담다.

정치 / 허상범 기자 / 2020-03-21 21:35:00
[물의 기록] 저자 안윤

책 소개



「고이거나 흐르거나 때로는 나를 넘어 범람하던 말들,


당신에게 무자비하게 뱉거나 묵묵히 삼키던 말들,


내게로 쏟아지거나 증발하던 말들,


나의 언어는 형태를 갖기에 희미하거나 무르다.」


<물의 기록>은 스토리지북앤필름의 다섯 번째 에세이 시리즈로, 안윤 작가의 에세이다.


책은 작가가 자신의 지난 수필집<수기水記>에 실었던 서른한 편의 글과 그 후의 시간이 담긴 스물아홉 편의 글을 담았다. <수기水記>를 쓴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작가는 희망한다.


"책장을 넘기면서 당신이,


미량의 다정함을 맛보고 허기를 달랠 수 있다면,


오늘을 수월하게 견딜 수 있다면


저는 사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출처: 스토리지북앤필름
출처: 스토리지북앤필름


저자 소개



저자: 안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자주 바라봅니다.


흔들리고 있는 것들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갑니다.


살아 있는 나날은 대부분 흐릿하거나 담담합니다만,


그럼에도 어떤 날에는 실금 같은 빛이 찾아와 줍니다.


따가운 희망 같은 것을 남기고 갑니다.


그것이 말이 되고 글이 되고 때로는 침묵이 됩니다.


곁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침묵을


굳이 언어의 편으로 불러오는 일,


그것이 밥벌이와 더불어 하고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수필집 <수기水記>를 썼습니다.





목차



총 248페이지





본문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그의 얼굴은 호방한 인상을 풍겼다. 이마가 시원하고 눈매가 둥글었다. 눈가에 잡힌 깊은 주름이 그가 어떤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며 살아왔는지 짐작케 했다. 그는 올해로 예순여섯이었다. 아내와 일남 일녀, 가족은 단출했다. 전해 들은 얘기로는 그가 죽음을 맞았던 순간 역시 조촐하기 그지없었다.



일행과 함께 향을 피우고 절을 했다. 영정 사진 앞에서 몸을 숙여 엎드릴 때, 내 그림자가 발밑으로 숨어드는 것 같았다.



- '영정 사진' 중에서 -




지금의 나는 지난날의 나보다 능숙하게 사과를 깎는다. 과육이 변색되기 전에 빠른 속도로 얇게 껍질을 벗길 줄 안다. 칼을 다루는 손놀림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제는 사과를 껍질째 먹을 때가 많다. 껍질과 과육의 완전한 배합, 그것이 사과의 맛이고, 사과 자체라고 느낀다. 그럼에도 가끔은 이렇게 사과를 깎아 보는 것이다. 외로운 어떤 날, 손바닥을 펼쳐 무릎 위에 놓고 내려다보듯이 가만가만 사과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지나간 나를 정물처럼 바라보고 그려보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사과, 하고 말해 본다. 어디선가 풋내가 난다. 내 그림자로부터 풍겨 오는 냄새, 여전히 설익은 채 살아 있는 나아게서 풍기는 냄새다.



- 16페이지 중에서 -




강을 바라본다.


강물의 주름은 거듭 새롭다.


물결은 사진의 숨결. 이것은 일 년여 전 어느 날의 기록이다. 그때의 일들은 이제 자세히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은 휘발되었고 감각의 기억 일부분만 남았다. 겨울이었고 강은, 봄을 믿지 않는 것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그때의 나는 현재의 나처럼 오늘을 살고 있었고 오늘 안에서, 살아왔던 나날 중 가장 젊은 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갑자기 시간이 갚을 수 없는 부채처럼 내게로 들이닥치고 있다고 느꼈다. 아니 그 감각이 나를 짓눌렀다. 작년 겨울 추위의 밀도를 나는 기억한다.



- '강을 건너다' 중에서 -




셔츠 옷깃에서 푸른 얼룩을 발견한 것은 세탁한 셔츠를 건조대에 널 때였다. 얼룩은 밝은 하늘색이었는데 함께 빤 옷 중에 얼룩의 빛깔과 비슷한 색의 옷은 한눈에 띄지 않았다. 건조대에 걸린 옷들을 찬찬히 살펴본 후에야 짐작이 갔다. 보라색 민소매 티셔츠가 얼룩의 원인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몸에 생긴 멍 자국처럼 얼룩은 셔츠 옷깃에 잠잠히 번져 있었다.


얼룩이 발견되면, 일단 얼룩이 스며든 부분을 한동안 바라보게 된다. 어디에서 이염된 것인지 자문하면서 손아귀에 움켜쥐고 비비거나 밝은 불빛에 비춰 보기도 한다.



- '얼룩' 중에서 -




소년이 무릎을 꿇기로 결심한 그 처음에 대해, 그가 앞으로 몇 번을 더 꿇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소년의 무릎뼈와 내 무릎뼈를 이루는 성분에 대해 생각했다.


몇 발짝 다가가면 소년의 무릎이 있었는데, 그 순간 나는 먼 타자였고 아니 먼 우주였다. 그의 무릎을 내 손끝으로 만져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삶이 꺾어 놓은 그의 무릎을 온전히 일으킬 수 없으리라는, 그러기에 나는 너무도 멀다는, 나 자신일 뿐이라는 무력감이, 짐을 짊어진 어깨에 더해졌다. 그러나 식탁 위에 짐을 부려 놓고 시원한 물 한 잔을 마시며 더위를 식히자 그 무력감도 한결 무력해졌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이렇게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모기가 물린 왼쪽 무릎에 연고를 바르면서.



- 108페이지 중에서 -




발을 자주 밟힌다. 만원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혼잡한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발을 밟히곤 한다. 밟히지 않는 날보다 밟히는 날이 더 많다고 체감할 정도다. 어깨나 팔도 잘 부딪힌다. 어깨를 부딪혀 메고 있던 가방이 흘러내릴 때도 많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초등학교 시절에도 내 실내화는 늘 앞코가 유난히 더러웠다. 구두나 워커를 새로 사면 얼마 못 가 앞코 귀퉁이가 주저앉곤 했다.


잘 밟히고 잘 부딪히는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봤다. 내 걸음걸이가 혼잡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리듬과 어울리지 못하거나 느릴 수도 있다.



- '피할수록' 중에서 -




바람을 맞서며 걸었어.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흔들리거나 쓰러지거나 무너졌는데 그렇게 살았는데 바람이 불어와 나를, 무언가에 맞서는, 맞설 수 있는 하나의 존재로 만들었어. 그것은 비겁하고 동시에 황홀하지.


바람에 맞서면서 나는 나를 앞으로 밀고 나갔어. 어느 곳으로 나를 밀고 나가든, 결국 나는 비공개의 시공간으로, 생의 마지막으로 도달하게 되어 있었지. 그때 나는 이미 무언가를 희망하지 않은지 오래였는데 문뜩 그곳에서 희망이란 걸 다시 가져보고 싶어졌지.



- '국경'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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