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관계도, 모두 안녕과 안녕 사이의 일

정치 / 허상범 기자 / 2019-12-29 15:41:18
<안녕과 안녕 사이> 저자 김파도


책 소개


[안녕과 안녕 사이]는 김파도 작가의 에세이다.


한국어는 만날 때 하는 인사와 헤어질 때 하는 인사가 같다. 만날 때도 안녕, 헤어질 때도 안녕. 마치 만남은 곧 헤어짐을, 헤어짐은 곧 또 다른 만남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사가 먼저 안다는 듯 말이다.


작가는 사랑도, 관계도, 흘러가는 하루들도 모두 안녕과 안녕 사이의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맞이하는 일과 보내는 일 그리고 그 사이에서 조금 더 나은 유영을 하기 위해, 그러기 위해 덜어둔 이야기들을 책에 담았다.


[출처: 인디펍]

저자 소개


저자: 김파도


잘 웃고 잘 우는 사람.


따뜻하고 차가운 사람.


파도를 좋아하고 또 닮은 사람.


목차


Part 1


그런 사람 10 / 나는 약속을 지켰어요 11 / 그림을 그리는 남자 13 / 햇살이 파도에 부서지고 15 / 하루살이 16 / 서로로부터 서로를 18 / 더 이상 19 / 나랑 아니면 21 / 후에 23 / 와장창 24 / 앎, 너 그리고 사랑 15 / 우리의 의무 26 / 사랑에 (빠)지는 일 27 / 사랑은 고민하는 거 아니에요 29 / 곡선의 마음 30 / 두 사람 31 /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한다 해도 32 / 나의 자랑 33 / 그들의 사랑법 34 / 너로부터 35 / 올바른 사랑의 모습 36 / 9월이라서 하는 이야기 38


Part 2


오늘의 일기 40 / 모래알 41 / 그럴 수 있지 42 / 깊은 슬픔 43 / 남은 것과 남은 것 45 / 안부 인사 46 / 나에게 없는 감정 47 / 그림자 49 / 관계의 섭리 51 / 2019 52 / 기다리는 사람 53 / 피아노 54 / 컵케이크 55 / 나쁜 말 아니에요 57 / 두 개의 해 58 / 잘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59 / 우리는 모른다, 모른다는 것마저도 61 / 미루면 안 되는 것들 63 / 좋은 사람 65 / 유일한 사람 66 / 플레이리스트 68 / 이곳에 새간다 70


Part 3


봄아, 74 / 오월 이십오일 75 /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76 / 그냥 생각 77 / 좋은 아침 78 / 솔직하게 말하면 79 / 숨바꼭질 80 / 환영해요 81 / Blue 82 / 결핍 84 /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85 / Moonlight 87 / 서른 89 / 좋아하지 않는 말 91 / 지향점 93 / 무해한 문장 94 / 보통의 하루 95 / 우주 96 / 그림의 언어 97 / 할머니의 속도 98 / 최종 결정권자 100 / 숙제 101


본문


소리가 제 스스로 흘러 나갈 때가 있다.


이야기들이 귀에 담기지 못하고,


마음에도 머무르지 못하고,


발화되는 순간부터 투명색의 언어가 되어 자취를 감추는.


나는 언제부터 너에게 그런 사람이었을까.


- '그런 사람' 중에서 -


글을 쓴다고, 언젠가는 꼭 책을 낼 거라고 얘기했을 때 그는 자신의 이야기도 써 달라고 했다. 글을 쓴다고 하면 흔히 듣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미소를 짓거나 말을 돌리는 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적어도 글에 대한 약속은 허투루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그가 같은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겠다고.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빨느 속도였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책을 내게 되면 꼭 말해 달라고. 나는 알겠다고 말하면서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가 내 책을 읽을 수 없을 거란 걸.


어느 가을날, 나는 그를 처음 보았다. 자그마한 얼굴에 마른 몸, 싱글벙글 웃고 있던 얼굴이 기억난다. 실없는 사람이네, 싶으면서도 웃는 얼굴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그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이다. 그리고 또 기억하는 건 그가 아프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 그는 마땅히 아파야 할 상황에도 아프지 않았다. 미친 듯이 일을 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상처 가득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다른 사람이면 울고 화낼 일에도 그는 감정이 없었다. 내 눈에는 그런 모습이 위태위태해 보였다. 그가 좀 아프기를, 아픈 김에 쉬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그러다가 지치면 방해 없는 긴 잠도 잘 수 있기를 바랐다.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에게 지어 준 별명이 있다. 그 별명대로 그가 한곳에 튼튼히 자리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들어 진심으로 기뻤다. 마지막으로 그를 봤을 때, 그는 전에 있던 초록을 잃고 말라 가고 있었으니까. 돌아보면 웃게 되는 일들과 반짝거리는 날들을 선물해 준 사람. 만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많은 것을 알려 준 사람. 고마운 사람. 그 사람의 마음과는 별개로, 나의 마음이 그랬다. 앞으로는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겠지만, 나는 그의 행복을 확신한다. 있어야 할 곳에 있는 나무는 아프지않으니까.


- '나는 약속을 지켰어요.' 중에서 -


그는 그림을 그린다. 낮 동안에는 생계를 위한 경제 활동을 하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그림을 그린다. 사실 그 외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최소한의 경제 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생각은 바삐 움직이는 손으로부터 자유롭다. 집으로 돌아가면 어떤 색을 섞을까. 어떤 부분을 덧칠하고 어떤 부분을 유지할까. 그의 머릿속은 오로지 그림뿐이다. 그의 친구들은 그런 그를 걱정한다. '나이도 있는데, 직장을 구하는 게 낫지 않겠어?'같은 부류의 걱정이 아니다. 그의 곁에 남은 사람 중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그의 친구들이 걱정하는 건 작업실이 따로 없는 그가 좁은 방에서 유화를 계속해서 쓴다는 것. 두통을 달고 산다는 것. 작업할 때는 밥이고 뭐고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걱정이다. 그도 그런 걱정들을 알고 있다. 어쩌다 통화하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항상 듣는 말이니까.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잘 아는 만큼,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그는 새삼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그로부터 얼마 뻗어 나가지 못한다. 그의 뇌는 아무래도 그림에만 작동하는 걸까.


누군가가 그에게 말했다. 그림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는 그 말을 듣자마자 헛웃음을 지었다. "아닌데."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그가 대답한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는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림을 몰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또 얼마나 좋았을까. 보통의 사람들처럼 평범한 학과를 나와서 평범한 회사에 다니고, 나이에 맞는 경제 활동을 하며 가정을 꾸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림을 몰랐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들을. 무엇보다 좋아했던 사람에게, 겨울의 햇볕보다 훨씬 더 따뜻한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 적어도 말은 할 수 있었을까. 좋아한다고. 오래전부터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그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그녀와 자신 같은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는 외로움에 익숙하고 주제 파악에는 더더욱 익숙한 사람이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마음을 스스로 저물게 했다. 대신 그는 매일 꽃을 그린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녀를 대신해서, 그녀 같은 꽃을. 현실에서 피우지 못한 그의 마음을 그림 속에서나마 피워 내려고.


- '그림을 그리는 남자' 중에서 -


나는 조금 슬퍼졌어요.


반짝거리는 당신을 봐서.


당신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너무 초라한데.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아,


당신은 나를.


나는 이제 어디에서나


당신을 보는데.


행복해 보여 좋아요.


덕분에 나는 웃어요.


알아봐 주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아.


사랑한다는 건 그런 거니까.



- '햇살이 파도에 부서지고' 중에서 -



알고 있었다.


네가 어떤 마음으로 나를 사랑했는지를. 모를 수가 없었다. 나도 같은 마음으로 그만큼 너를 사랑했으니까. 우리가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면 된다고 믿었다. 서로를 놓지 않는 한 달라질 수 있는 건 없다고.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지치지도 않고 속삭였다. 달라질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이 될지는 모르고서. 나와 너는 너무 닮았고 또 철저히 다른 사람이었다. 어떤 때에는 나를 보는 것 같아 더 화가 나 싫었고, 어떤 때에는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게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로웠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렇게 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서로를 그만큼 사랑했단 뜻이겠지.


내가 사랑받고 싶은 대로 나를 사랑해 줄 수 없는 사람. 네가 사랑받고 싶은 대로 너를 사랑해 줄 수 없는 사람. 그건 우리가 가진 또 다른 이름이었다. 소리 내어 부르지 않아도 우리를 깊숙이 파고들어 놓아 주지 않는 이름. 마음과 이름이 싸운 곳에는 어김없이 생채기가 남았다. 긁히고 찔리고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어서야 우리는 항복했다. 그 이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서로로부터 서로를 구하기 위해 손을 놓았다.


- '서로로부터 서로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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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상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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