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고 쓰는 삶이란 연약한 연필심을 지팡이 삼아 산을 오르는 일이다

정치 / 허상범 기자 / 2019-10-27 23:42:56
<권수정 산문집 : 산으로 간 문장들> 저자 권수정


책 소개


[권수정 산문집 : 산으로 간 문장들]은 권수정 작가의 에세이다.


"글을 읽고 글을 쓰는 삶이란 마치 약한 연필심을 지팡이 삼아 산을 오르는 일이다. 물리적인 연필로는 산에 오를 수 없지만 그 연필로 쓰인 글에는 삶을 더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작가가 2018년 12월부터 2019년 6월까지 '퍼킨스'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매주 한 편씩 발송했던 원고들이 모여 책이 되었다. 그중에 공개되면 일상이 위기에 처할 만한 격동적인 에피소드가 몇 있어 전부 싣지는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사는 모습은 이러한데 남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묻고자 작가는 이 책을 던진다고 말한다.


[출처: 스토리지북앤필름]


저자 소개


저자: 권수정(1994~ )


일단 쓰는 일의 재미를 알아버린 사람이 그 일을 그만둘 수 있을까.


남아 있는 삶은 더 좋은 글을 써내기 위해 더 많이 읽고, 보고, 쓰고, 경험하는 일로 채우고 싶다.


독립출판물 [슬픔 속에 오래 있었다]를 펴냈다.


목차


무항산 무항심 / 충분한 인생 / 오늘의 다행 / 돈 값 / 질문 하나 / 나의 읽기(上) / 나의 읽기(下) / 아직도 사랑을 믿는 사람들에 관하여 / 나의 사랑하는 집 / 결핍 /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 엄마가 가여워질 때 / 죽음이라는 소식 / 나의 친애하는 사람 / 3월의 단상 / 나마스테 / 4월의 달력 / 허술한 2박 3일 제주 여행 / 서글픈 부동산 탐방기와 자기만의 방(上) / 서글픈 부동산 탐방기와 자기만의 방(下) / 스파링 금지 / 살아 있는 삶 / 그대 안의 블루


본문


한 걸인이 있다. 은전 하나를 들고 전장(돈 바꾸는 곳)에 들어가 이렇게 물어본다. "이게 진짜 은전인지 좀 봐주십시오" 전장 주인이 대답한다. "하-오. (좋소.)"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걸인은 또 다른 전장에 들어가 묻는다. "이것이 은전이 맞습니까?" 전장 주인이 대답한다. "하-오." 걸인은 다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다. 이 모습을 가민히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조심스레 걸인에게 다가가 묻는다. 누가 당신에게 이렇게 큰돈을 적선해주었냐고. 걸인이 답한다. 은전을 받은 것이 아니고, 한 푼을 모아 닢을 만들고, 닢을 모아 각전 닢과 바꾸는 일을 여섯 번 반복하여 이 은전을 만들었다고. 뭘 하려고 그 돈을 모았느냐는 남자의 질문에 걸인이 이렇게 답한다.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피천득이 쓴 '은전 한 닢'이라는 수필의 내용이다. 보통 수필이라 하면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깨달은 바를 서술하는 교훈적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은데, '은전 한 닢'은 그렇지 않다. 글은 그저 은전 한 닢을 가져보고 싶었다는 걸인의 대사로 끝나버린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라는 듯. 나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 탄성에 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걸인의 간절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질문 하나, 35페이지 중에서 -


눈부시게 푸른 4월이다. 남쪽 나라의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 매일 아침 벚꽃 잎을 흩날리던 벚나무는 어느새 녹색으로 물들었고, 근처 동네에서는 유채꽃이 밭으로 피어 장관이니 구경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럼에도 사람을 들뜨게 하는 모든 것과 그에 덩달아 들뜨는 나 자신이 싫은 사람이라, 12월이 그랬고 1월이 그랬듯 4월도 매양 기쁘지만은 않다.


1년 전, 2018년 4월에는 뭘 했더라. 준비했던 시험에 합격한 상태로 대학의 봄학기를 지냈다. 직장이 보장되어 학점이 필요 없는 대학생의 삶이란 긴말 필요 없는 호시절이었다. 하루 종일 영화를 보며, 책을 읽고, 좋아하는 카페에서 뒹굴거렸다. 가끔 수업에 갔고, 주말이면 애인을 만나곤 했다. 그러다 돌연히, 정말 말 그대로 돌연히 그 연인과 헤어졌다. 그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기차역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며 글을 썼다. 4월 3일이 지나가고 4월 16일이 지나가고 4월 19일 이후의 일이었겠지.


그때 나는 한동안 슬픔을 몰랐다. 사는 일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던 시절이라, 세상에 고통과 부조리 같은 게 있었던가, 따위의 공상에 빠져 살았던 시절이라, 그런 날들에 무감한 채 살았으리라. 4월의 달력에 기록된 차고 슬픈 일들을 온통 잊은 채 살았으리라. 그러다 문득 거대한 슬픔이 나를 덮쳐 오던 날,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지나쳐가는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에서 비로소 어떤 고통을 보았으리라. 나는 4월의 달력에 비극 하나를 적어 넣었다.


- 4월의 달력, 111페이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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