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아는 눈치 게임이다. 힘든 일을 누가 먼저 나서서 할 것인지 끊임없이 상대의 기색을 살피게 되는 고난도의 눈치 게임. 육아 중인 부부에게 가장 필요한 건 희생과 배려의 자세다. 하지만 글과 현실은 사뭇 다르다. 치열한 육아 현장에선 이타적인 마음을 갖는 게 쉽지 않다. 잠이 부족하면 만사가 귀찮아진다. 상대의 행동이 유독 굼떠 보이고, 사소한 실수에 짜증이 울컥 치솟기도 한다. 심지어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마저 무시하게 된다. 그렇게 점점 서로의 이기적인 면을 알아가는 게 육아라는 눈치 게임의 본질이다.
남편은 유머가 많고 자상한 사람이다. 웃길 땐 정말 어찌나 웃긴지 한 번씩 빵빵 터질 때마다 '아, 이 사람과 결혼하길 정말 잘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좋은 배우자를 골랐다는 만족감은 바람 잘 날 없는 결혼 생활을 지탱해주는 단단한 기둥이 된다. 다른 건 몰라도 웃긴 거 하나는 100점인 사람인데, 육아로 인한 피로도가 쌓이자 남편의 얼굴에서 내가 좋아하는 개구진 표정이 싹 증발해 버렸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몸이 힘드니 평소 남편을 향한 감정이 가뭄철 논밭처럼 쩍쩍 갈라졌다. 육아를 하면서도 여성스러움을 잃지 않는 사랑스럽고 현명한 아내가 되고 싶었는데, 현실은 미간에 川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악에 받힌 아줌마였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 좀비처럼 휘적휘적 집안을 돌아다니며 영혼 없이 육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지친 것도 힘들지만, 지친 상대를 보는 게 더 힘들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지침의 과정은 무한 반복되고 그렇게 한 지붕 아래 사는 두 좀비는 눈빛을 나누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때부터였다. 남편이 화장실을 자주 찾게 된 것은. 언제부턴가 남편은 화장실에만 들어가면 함흥차사였다. 연기처럼 사라져서 어디 갔지? 하고 둘러보면 여지없이 화장실 불이 켜져 있고 안에서는 핸드폰 소리가 났다. 화장실 안에서 남편의 시간은 '일시정지' 버튼이 눌러진 듯했다. 배변 활동이 주가 아님은 분명했다. 남편은 화장실에서 '랑그릿사' 자동 돌리고, '클래시로얄'도 한 판 하고, 유튜브로 트와이스 영상도 보고, [슈퍼밴드] 음원도 다운받아 듣고 있었다(대체 뭘 하느냐고 캐물어서 들은 대답 & 밖에서 들리는 사운드로 유추한 결과다).
처음엔 어이가 없었다. 나는 아이가 신경 쓰여서 볼일 볼 때조차 대충 싸고 대충 닦는데. 남편이 화장실에서 그렇게 유유자적 자유시간을 보낸다는 게 부아가 치밀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화장실 들어가기 전과 후 달라진 남편의 모습이 포착됐다. 들어갈 땐 푹 담근 오이지처럼 피곤에 절어있던 표정이, 나올 때는 엄마 허락받고 오락실 다녀온 아이마냥 밝아져 있었다.
화장실은 남편의 비상구요, 일탈의 장소이자, 내가 모르는 차원으로 향하는 비밀 통로였다. 남편은 변기에 앉음과 동시에 화장실 문 밖의 세상은 잊어버린 채 게임을 하고 음악을 듣고 인터넷 게시판 댓글을 보며 육아와 잔소리에 지친 몸과 마음을 리프레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화장실은 쉴 틈 없는 육아 전쟁터에서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는 영혼의 방공호였다.
사랑하는 남편의 인권을 존중하기 위해. 그리고 공동 육아 파트너의 건강한 멘탈 유지를 위해. 남편이 화장실에 들어가면 나는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는 연습을 한다. 우리 집 화장실엔 싱크홀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남편이 화장실에 들어간 지 20분이 지나도 나는 문 앞에 서서 "뭐 해?"라고 묻지 않을 거다. 남편이 싱크홀에 빠졌다가 돌아오면 얼마나 반갑고 기쁠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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