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사를 그만두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날을 기억한다. 옅은 웃음을 띤 CEO의 얼굴, 심드렁한 눈빛으로 박수를 치던 임원들, 한층 편안해진 표정의 팀원들. PT를 무사히 마쳤고, 질책이나 타박 대신 칭찬과 격려가 있었다. 잔웃음을 지어 보이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모든 것이 좋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내가 기쁘지 않다는 사실만 제외하고는.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한 내용과 타인의 추어올림이 내게 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 떠밀리듯 맡게 된 일은 고객의 목소리를 모아 보기 좋게 정리하고, 이미 정해져 있던 회사의 전략에 끼워 맞추는 것이었다. 답정너와 다름없는 일을 두고 이리저리 의견을 구했다. 선배 1은 '원래 그런 것'이라 대꾸했다. '그게 왜 이상해?'라고 되물은 건 선배 2였다. 선배 3은 '그냥 빨리 쳐내'라는 말을 위로하듯 건넸다. 누군가에겐 그런 태도가 농익은 슬기일 수 있지만, 내겐 헛헛함이었다. 불행히도.
선배 1에게는 원래 그렇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물었다. 내가 기억하는 대답은 '체념'이다. 직장에서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단다. 그러니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괜히 힘쓰지 말고 '그냥 하는 것'이 속 편하다는 게 요지였다. 비록 그게 이치에 맞지 않거나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린 직장인이니까.
선배 2에게는 그게 왜 이상하지 않은지 물었다. 내가 기억하는 대답은 '관성'이다. 그동안 똑같은 방식으로 보고를 해왔고, 경영진이 마음에 들어할 메시지를 뽑는 것이 곧 우리의 일이라고. 다른 관점이나 의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우리 일만 잘하면' 회사는 잘 굴러간다는 게 골자였다. 혹여 그 시사점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지라도,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야 말로 직장인의 자세라는 말도 덧붙였다.
선배 3에게는 일을 빨리 털어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물었다. 내가 기억하는 대답은 '타협'이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을 견디며 일하는 것을 직장에서 매기는 세금으로 여길 것을 권했다. 내게 중요하지 않지만 회사가 나에게 요구하는 일이 있다면, '얼른 해주고' 본인이 원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이득이란다. 일터에 대해 고고한 태도나 환상은 버리고, 내줄 것은 내주되 회사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취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사뭇 다른 세 가지 이야기를 들으며, 불현듯 멍게를 떠올렸다. 뇌를 지닌 동물로 태어나지만, 자리를 잡으면 뇌를 먹어치우고 식물처럼 살아가는 바다생물 멍게. 사람도, 일도, 생각도, 감정도 익숙함에 잠기면 바위에 붙은 멍게처럼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것.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사회 초년생 때는 알지 못했다. 어찌 보면 이른 퇴사를 결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낭만을 지닌 채 체념, 관성, 그리고 타협을 마주했으니.
일터를 성장의 터전으로 가꾸는 것이 오롯이 내 몫임을 깨닫기까진 시간이 좀 걸렸다. 7년이라는 경력이 켜켜이 쌓인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체념도, 관성도, 타협도 아닌 '쟁취'다. 직장이란 본디 사람이라는 복잡다단한 소우주의 집합체, 각자의 바람이 얽히고설킨 곳에서 나혼자 뻗대 봐야 금세 고꾸라지기 일쑤더라. 고로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떠나는 대신, 온갖 케케묵음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나만의 영토를 확장해 보기로 했다. 몸담고 있는 곳에 그만한 가치와 가능성이 남아있다면 말이지.
양껏 너스레를 떨지만, 당장 기울일 수 있는 노력은 내 앞에 놓인 일을 찬찬히 뜯어보는 것뿐이다. 결핍과 갈망은 언제나 우리를 움직이게 만들기에. '원래 그런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 해보기도 하고, 그간의 방식을 고수한 이유를 캐묻는다. 나름대로 '우리의 일'을 다시 정의해보기도 하고, 가끔은 '적당히 타협해야 하는 일'의 경계를 기준 삼아 내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 가늠하기도 한다. 이런 딴짓을 마음껏 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함은 물론이다.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지만, 고루함을 이해해야만 새로움을 상상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이 과정은 미련해 보이더라도 귀한 가치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주어진 일에 쫓기는 직원 1'이 아닌, '나만의 미래를 그리는 일잘러'로 거듭나기 위함이다. 바위에 찰싹 붙어버린 멍게가 되기보다는, 나 자신을 쟁취하며 일하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내 손때가 묻은 일에서 나만의 색이 배어 나오는 거, 일잘러를 꿈꾸는 모든 이들의 로망이 아닐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로망을 실현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고, 거저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안정과 익숙함에 안주하는 대신 힘겨루기와 실랑이를 감수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그 과정 끝에 성장하길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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