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들어간 형의 방에서 유난히 라벨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술을 발견했다. 진한 녹색 병을 휘감은 검은 라벨이 풍기는 우아함은 내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아직 개봉이 안 된 술이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 이미 반쯤 마신 상태였고, 조금 마신다고 해서 딱히 티가 날 것 같지는 않았다. 형도 내 맥주 마셨으니까, 이걸로 퉁 치면 되겠지. 당위성이 확보된 후의 행동은 놀랄 만큼 빨랐다. 위스키를 따기도 전에 잔과 안주를 준비하고, 간만의 음주를 더 즐겁게 해 줄 영상도 틀어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코르크 마개를 여는 것뿐. 어떤 향이 나를 반겨줄까. 그리고 나를 맞이한건 다름아닌
정로환
꽉 낀 코르크 마개를 빼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터져나온 것은 정로환의 냄새였다. 병 안에서 봉인되어있던 냄새가 폭발하듯 방 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고, 본능적으로 뚜껑을 닫고 상황 파악에 나섰다. 물통 안에 담긴 약주라든가, 참기름병 안에 담긴 간장 등에 된통 당했던 기억이 있기에 이번에도 같은 경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액상 정로환이 있을리가 없을뿐더러 그걸 300ml넘게 다른 술들과 함께 보관할 이유도 없다. 아무리 사는게 힘들다고 해도 정로환으로 담금주를 해먹을 정도로 사람이 이상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술의 정체는 대체 무어란말인가.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한 번 마셔보면 알게 되겠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다시 한 번 뚜껑을 따니 이번엔 첫 시도만큼 역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벌써 적응이 되어버린걸까. 향을 잘 모아주는 위스키 잔에 적당히 술을 따라내고 정체불명의 액체로 입 안을 촉촉하게 적셔보았다. 처음에는 정로환 냄새만 강하게 피어오르더니 점점 달콤한 꿀과 초콜렛의 맛이 느껴지고, 역하다고 생각했던 정로환 냄새마저 편안한 훈연향으로 바뀌어있었다.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미지의 맛에서 느껴지는 당혹감은 이내 짜릿한 쾌감으로 밀어닥쳤다. 난 결국 강아지 발바닥의 꼬순내에 중독된 사람처럼 잔에 남겨진 향을 맡고 또 맡으며 후각 세포 하나하나에 그 냄새를 각인시켰다.
아드벡이라는 이름의 그 술이 특유의 정로환 향 때문에 호불호도 많이 갈리지만 그만큼 매니아 층이 굳건한 위스키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나도 그 매력에 빠져 아드벡과 비슷한 위스키들을 사모으다보니 정로환 향이 나는 위스키에서부터 아이오딘이나 병원 수술실 냄새가 나는 위스키까지 온갖 특이한 향을 가진 위스키를 사 모으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고수나 홍어, 마라탕도 처음에는 특유의 향 때문에 거부감을 가졌었지만 이제는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이런 위스키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고보니 형이 전에 ‘어머니는 위스키를 싫어하시니 다른 술을 사드리라’고 말했던게 문득 떠올랐다. 허허… 처음부터 이런걸 드리니까 당연히 싫어하실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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