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깍두기 썰던 밤.’ 나는 그 날을 그렇게 기억한다.
대학원에 입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내가 선택한 세부 전공은 정말 비주류인,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이 속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 속한 이들은 서로를 “식구”라 부르며 “식구”답게 정기적으로 모여 식사를 한다. 새로 받은 학생증에 잉크도 마르지 않았던 그때, 나에게도 초대장이 왔다. 이 조그만 식구의 아버지쯤 되는 원로 교수님이 우리 학교를 방문하실 예정이니 모두 모여 식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아주 폐쇄적인 그 모임은 어느정도 선별적으로 “식구”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당시의 나에게 이것은 조금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10분정도 먼저 도착했지만 원로 교수와 그를 보좌하고 있는 꼬마 교수 한 명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나는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뒤 앉아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유학 중에 잠시 한국에 들어와 있는 학생들 몇 명이 바로 도착해서 그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주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나의 지도교수도 그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모두 도착하자 나를 제외하고 서열이 가장 낮아 총무 역할을 맡고 있는 학생이 ‘아무거나’ 시키라는 원로 교수의 말에 따라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적당히, 센스 있는” 음식 주문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이 식구의 가족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던 나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머리속에서 이야기들의 퍼즐을 맞추고 있었다. 이들 중 외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이 원로 교수의 추천서가 매우 중요한 모양이었다. 또,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 자리를 가지고 유지하기 위해 이 사람이 가진 인맥과 학계에서의 지위가 필요한 것 같았다. 이 식구들은 혈연이 아니라 학연으로 진하게 얽혀 있었고, 명확한 서열에 따라 위에서부터 아래로 좋은 옷을 물려 입고 있었다.
대화가 무르익고 이 화목한 식구들에 대해 점점 더 알아 감에 따라, 나는 바쁘신 식당 직원분들을 대신해 서빙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그것을 시키지 않았다. 다만, 술이 떨어지면 빈 술병을 가만히 응시하고, 김치가 떨어지면 두리번두리번 거리는 대왕 문어가 있었다. 가운데에 앉아 테이블 이곳 저곳으로 꾸물꾸물 시선을 뻗치며 다른 이들이 술잔을 제대로 비웠나 확인하는 원로 교수는 영락없는 대왕 문어 같았다. 나는 대왕 문어의 눈치를 살피며 그가 원하는 것들을 재빨리 갖다 바쳤다. 따르기 무섭게 비워지는 그의 술잔을 채우고, 그가 주는 술을 군소리 없이 받아 마시고, 재미도 없을뿐더러 혐오스러운 그의 유머에 애써 웃으며 쉴 새 없이 그가 흡입하는 깍두기를 썰었다. 깍두기 하나에 추천서와 깍두기 하나에 유학과 깍두기 하나에 박사학위와 깍두기 하나에 직장과 깍두기 하나에 나의 미래. 나의 미래를 생각하며 깍두기 하나에 아름다운 미래의 것 하나씩을 생각해보았다. 왠지 모르게 모든 것이 더럽고 치사하게 느껴졌지만 그 날은 그냥 깍두기를 많이 썰었다. 아주 많은 깍두기를 썰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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