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밤에 놀러오세요]는 양지윤 작가의 소설이다.
일본 시코쿠 섬의 고치에서는 매년 여름마다 '요사코이' 축제가 열린다. 요사코이 축제를 취재하기 위해 고치에 간 선우는 축제를 보며 오래전 헤어진 연인 K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밤하늘을 다채롭게 수놓는 불꽃을 바라보며 K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축제가 절정에 이를 무렵 선우는 그동안 몰랐던 진실과 맞딱드리게 된다.
소설은 폭죽이 터지고 난 뒤 스러지듯 사라져가는 불꽃같은 사랑과 이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많은 기억들을 상실하며 살아갑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자신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인연들을 기억해내고 추억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저자 소개
저자: 양지윤
프리랜서 번역가.
끊임없이 아날로그 사물을 탐하며 필욕(筆欲)의 시대에서 그 욕구에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
이름(지윤: 진실로 기록하다)대로 살기 위해 매 순간 고군분투 중.
목차
전야제
기억속의 멜로디
우리가 있었다
밤에 놀러오세요
축제가 끝나고 난 후
추천사
ANNE의 다락방
본문
함박눈이 내리는 새벽, 선우는 도다코엔의 하천을 따라 혼자 걷고 있었다. 내리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눈을 바라보며 선우는 설렘과 쓸쓸함이 동시에 느껴져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고소한 빵 냄새가 풍겨왔다. K의 원룸 근처에 빵집이 생긴 모양이었다. 선우가 빵집에 들어서자 밝은 미소와 함께 직원들이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선우의 얼었던 볼과 손이 사르르 녹았다. 선우는 K가 좋아하는 카레빵을 사서 원룸으로 갔다. K의 집 현관문 앞에 작은 상자가 놓여있었다. 시간이 꽤 지났는지 상자 위로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선우는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현관문 앞에 가까이 다가가 상자에 손을 댔다. 이상하게도 눈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선우는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새끼 고양이가 들어있었다.
잠자고 있나 봐.
언제 나왔는지 K가 고양이를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선우와는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은 채 K는 계속 고양이만 보고 있었다.
죽었잖아.
갑자기 뒤에서 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간 아르바이트라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인 걸까. K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고양이의 머리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고양이의 몸에 손을 갖다 댔다. K의 손등 위로 함박눈이 소리 없이 떨어졌다.
차가워.
눈이 차갑다는 건지 고양이의 몸이 차갑다는 건지 선우는 알 수 없었다. 빵집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선우의 손이 점점 빨개졌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고양이의 몸처럼 카레빵도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식기 전에 빨리 K에게 전해줘야 하는데.
선우 씨, 술 한 잔 할래요?
뿌예진 안경 사이로 탄의 작은 눈이 흐릿하게 보였다. 고양이만 바라보던 K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선우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며 속삭였다.
마음 시린 날에는 따뜻한 우메슈가 특효약이지.
또 K의 꿈을 꿨다. 침대에서 술을 마시다가 까무룩 잠이 든 모양이었다. 바닥에는 찌그러진 종이팩과 찻잔이 널브러져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빙그르 몸을 돌려 눕던 선우는 소름 끼칠 만큼 차가운 침대시트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전히 에어컨은 기세 좋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틀 연속 K의 꿈이라니. 계속 이곳에 있다가는 이미 식었다고 믿었던 K에 대한 애정마저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선우는 고치 시청 팀의 모습만 서둘러 찍고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며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 본문 중에서 -
노면전차에서 내린 선우는 하리마야 다리를 한 번 더 보러 갔다. 수분을 머금은 다리는 어제보다 빨강이 한층 짙어져 있었다.
준신과 오우마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 두 사람은 그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이토록 오랜 세월을 거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리라는 사실을 짐작이나 했을까.
- 왜 그렇게 그 가사에 집착하는 거야? 결국 둘은 이루어지지 않았잖아. 난 그런 슬픈 결말은 싫더라.
선우의 말에 K는 특유의 유약해 보이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 이루어지지 못했으니까. 그 가사를 반복해서 부르면 왠지 그들이 행복했던 순간이 되풀이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이루어지지 못해서'라는 K의 말을 당시 선우는 이해하지 못했다. 유독 약해보이던 그의 미소까지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K가 느꼈을 감정들과, 그의 미소가 그토록 희미해 보였던 이유를.
K는 예감했던 것일까. 우리 역시 준신과 오우마처럼 비극적으로 끝나게 되리라는 것을. 유독 그 가사에 집착했던 이유도 어쩌면 우리들의 행복했던 순간이 되풀이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지도 모른다.
비가 그치자 중단되었던 공연이 다시 시작되었다. 선우는 하리마야 다리 상점가로 향했다. 아케이드 양쪽 통로는 공연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케이드 입구 쪽에서 '고치시청'이라고 쓰인 간판을 단 지카타샤가 천천히 전진하고 있었다. 어느덧 선우의 귀에도 익숙해진 노랫말이 들려왔다.
도사 고치의 하리마야 다리에서 비녀 사는 스님을 보았네-
여자의 구성진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
사람들 틈을 파고든 선우는 맨 앞 열에 서서 공연을 구경했다. 파란 상의에 연분홍색 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오도리코들이 나루코를 깔딱거리며 천천히 지나갔다. 사람들은 오도리코들을 향해 부채질을 하며 격려해주었고, 오도리코들은 보답이라도 하듯 활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치 오우마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무척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 찰나의 모습을 사진에 담은 선우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멀어지는 선우의 뒤에서 사람들이 요사코이를 외치고 있었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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