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밸류=한시은 기자] 중국이 무역과 시장 접근을 외교·안보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는 이른바 ‘경제적 강압(economic coercion)’이 이미 구조적 위협 단계에 진입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8일 최종현학술원에 따르면,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지정학·외교정책 담당 소장이자 조지타운대 석좌교수가 지난 6일 서울 강남구 최종현학술원에서 열린 특별강연에서 최근 출간한 저서 ‘중국의 무역 무기화’를 소개하며 이같이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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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일 서울 강남구 한국고등교육재단 빌딩에서 열린 최종현학술원 주최 특별강연에서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지정학·외교정책 담당 소장 겸 조지타운대 석좌교수가 강연하고 있다./사진=최종현학술원 제공 |
차 교수는 ‘경제적 강압’을 보호무역이나 일반적인 통상 분쟁과는 구별되는 개념으로 정의했다. 이는 시장 접근이나 공정 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국의 주권적 정치 선택을 바꾸기 위해 무역과 투자를 수단으로 활용하는 행위라는 설명이다.
그는 “중국의 경제적 강압은 민주주의·인권·영토 문제에 대한 발언 자체를 위축시키는 효과를 낳는다”며 “단순한 무역 문제가 아니라 규칙 기반 국제질서의 회복력과 직결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차 교수에 따르면, 중국은 1997년 이후 최소 600건 이상의 경제적 강압 사례를 통해 18개국, 470개 기업을 압박해 왔다. 미국 기업이 278곳으로 가장 많았고, 일본(59곳), 한국과 대만(각각 33곳)도 주요 대상에 포함됐다.
특히 시진핑 집권 이후 관련 사례는 가파르게 증가했다. 차 교수는 “이 수치조차 실제 규모를 과소평가한 것”이라며 “많은 정부와 기업이 보복을 우려해 피해 사실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중국식 경제 압박의 특징으로 △비공식·비공개 방식 △명확한 법적 근거의 부재 △WTO 제소가 어려운 수단 활용을 꼽았다. 노르웨이산 연어 수입 중단, 일본에 대한 희토류 압박, 한국에 대한 단체관광 중단 조치가 모두 같은 맥락에 속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중국은 제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도, 문서로 남기지도 않는다. 전화나 구두 지시를 통해 ‘종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핵심”이라며 “이는 시장 접근이나 공정무역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 국가의 주권적 선택에 대한 정치적 보복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 “중국의 구조적 취약성부터 직시해야”…“OLED 등 對중국 고의존 품목, 전략 자산 될 수 있다”
차 교수는 중국의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방어를 넘어, 중국의 구조적 취약점을 역으로 식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제시한 유엔 국제무역정보센터(UN Comtrade) 2024년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중국은 589개 품목에서 수입 의존도가 70%를 넘고 있으며, 이 가운데 259개 품목은 의존도가 90%를 상회한다.
특히 OLED 디스플레이 패널의 경우 중국의 수입 의존도가 94%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이 수입하는 OLED 패널의 상당 부분이 한국산이라는 점에서, 동맹국 간 공조가 이뤄질 경우 실질적인 레버리지로 작동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산 비고리형 탄화수소, 일본산 산업용 로봇과 은분(태양광 패널 핵심 소재) 역시 중국이 단기간에 대체하기 어려운 고의존 품목으로 지목됐다.
차 교수는 “개별 국가로서는 취약할 수 있지만, 연합하면 중국에 실질적인 압박 수단을 가질 수 있다”며 “상호의존성의 비대칭을 활용해 중국의 무역 무기화 시도를 사전에 차단하는 억제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디리스킹의 한계…동맹국 간 ‘집단적 회복력’이 대안 될 것”
최근 각국이 추진하는 디리스킹(de-risking), 즉 공급망 다변화 전략에 대해서도 차 교수는 한계를 짚었다. 차 교수는 “한 공급망을 지키면 중국은 다른 공급망을 공격한다”며 “문제는 대응이 아니라 억지(deterrence)”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집단적 회복력(collective resilience)’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나토(NATO)의 집단방위 논리를 경제 영역에 적용해, 중국이 한 국가를 압박할 경우 유사 입장국들이 공동으로 보복 조치를 취하겠다는 신뢰성 있는 약속을 사전에 형성하자는 구상이다.
디리스킹은 중국과 경제적으로 완전히 단절하거나 적대적으로 선을 긋는 ‘디커플링’이 아닌, 중국 의존도가 높은 핵심 기술·산업·공급망에서 리스크를 완화하려는 서방 국가들의 실용적 접근 전략을 말한다.
그가 말한 ‘집단적 회복력’은 특정 국가가 경제적 강압을 받을 경우 동맹·파트너국들이 서로의 취약 품목(고의존 품목)을 분담해 ‘한 가지씩’ 대응 카드(억지 수단)를 준비해두는 방식이다.
차 교수는 “각국이 모든 품목을 방어하려 들 필요는 없다”며 “각자가 하나의 핵심 취약 품목을 맡아 공동 억지력을 구성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설명했다.
또 차 교수는 유럽연합(EU)의 ‘통상위협대응조치(Anti-Coercion Instrument, ACI)’를 사례로 들며 “2023년 말 EU가 이 제도를 발표한 이후 중국의 유사 행위가 눈에 띄게 줄었다”며 “억지의 효과는 실제 사용이 아니라, 사용될 수 있다는 신뢰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동북아와 인도·태평양에는 아직 이런 장치가 없다”고 지적하며, “한국은 기술력과 공급망 내 위상이 높고, 동시에 중국의 압박을 직접 경험한 국가이기 때문에 미국·일본과 함께 집단적 경제 억지 체계를 논의할 충분한 위치에 있다”고 말했다.
차 교수는 집단적 경제 억지를 “무역 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전쟁을 막기 위한 전략”이라고 규정했다. “미국의 핵 억지가 핵전쟁을 막기 위한 것이듯, 경제 억지는 경제 전쟁을 예방하기 위한 장치”라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동맹을 압박하는 전략이 아니라, 동맹을 결속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공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이어진 최석영 전 외교부 경제통상대사와의 대담에서 빅터 차 교수는 ‘미·중 사이 전략적 모호성’의 가능성에 대해 선을 그었다. 그는 “과거에는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공식이 회자됐지만, 이제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한 선택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차 교수는 한국 기업의 투자 흐름과 공급망 재편을 근거로 “장기적으로는 미국 중심 공급망을 선택하는 방향성이 분명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다만 “희토류 등 일부 핵심 품목에서는 여전히 중국 의존이 남아 있으며, 이것이 구조적 리스크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핵심 광물 공급망과 관련해서는 “중국은 핵심 광물을 외교·통상의 수단으로 ‘무기화’해온 전례가 있다”며 “이 때문에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들이 공급망 확보 협력에 나서는 것은 사실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피한 대응”이라고 강조했다.
집단적 회복력이 제재와 유사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대이란 제재처럼 모든 국가가 동일한 수준의 압박을 실행해야 하는 방식보다 훨씬 부담이 적다”고 설명했다. “각국이 147개 품목 전체를 책임질 필요는 없고, 자국이 가장 취약한 단 하나의 고의존 품목만 맡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완벽하지 않고 누수(leakage)가 발생할 수 있다”면서도 “제재가 불완전하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듯, 집단 회복력 역시 불완전함을 이유로 외면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아무 대응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선택”이라고 경고했다.
◇ “EU의 ‘통상위협대응조치’ 실제 효과 있어, G7+한국·호주 포함 중견국 연대가 현실적”
현장 청중 투표에서는 무역 무기화의 주요 행위자로 미국과 중국을 모두 지목한 응답이 다수를 차지했다. 차 교수는 중국의 경제적 강압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면서도, 미국 또한 최근 통상을 전략적 압박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이제는 ‘중국 리스크’만이 아니라 ‘미국 리스크’도 함께 관리해야 하는 시대”라며 “중견국들은 어느 한쪽에만 의존하지 않고, 서로를 향한 협력과 제도 구축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차 교수는 집단적 회복력의 실행 단위로 G7을 중심으로 한국과 호주 등 중견국이 결합하는 구상을 제시했다.
그는 “유럽 국가들은 이미 EU 차원의 통상위협대응조치(ACI)를 공유하고 있고, 일본과 호주는 중국의 경제적 압박을 직접 경험하며 대응 의지를 보여왔다”며 “이들과 한국이 결합한 ‘G7+한국·호주’ 구성이 가장 현실적인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최근 흐름에 대해 “중견국들은 더 이상 중국이나 미국 한쪽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며 “캐나다, EU, 일본, 호주 등은 서로를 향한 수평적 협력과 소다자 제도 구축을 본격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제 디리스킹은 동맹 내부 문제를 넘어 중견국 간 새로운 질서 실험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차 교수는 “한국 역시 이런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다”며 “이제 남은 과제는 같은 선택을 한 국가들과 얼마나 조직적으로 연대하느냐”라고 말했다. 이어 “개별 국가는 취약하지만, 미국·한국·일본·호주, 나아가 G7이 함께 움직인다면 중국 역시 ‘비용’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 “미국의 관세 압박, 안보 협력에 전술적 부담될 수 있어…해법은 관세 아니라 연대”
현장에서는 한·미 간 관세·통상 현안이 안보 협력으로 번질 가능성도 논의됐다. 차 교수는 “최근 미국 행정부 하에서 공동 문서의 우선순위가 과거와 달리 통상·투자 이슈가 앞에 놓이는 경향이 뚜렷하다”며 “경제 분야의 진전 부족이 안보 협상에 전술적으로 영향을 주는 위험은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럼에도 안보 현안의 중대성과 양측의 전략적 이해가 크기 때문에, 전략 차원의 협력이 완전히 막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차 교수는 미국의 통상 압박에 대해서는 “중국의 경제적 강압과 동일선상에 놓아선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와 통상 압박은 영구적인 전략이라기보다 협상을 위한 일시적 수단에 가깝다”며 “30년 넘게 반복·축적된 중국의 경제적 강압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미국이 동맹국들을 겁주거나 압박하는 방식은 전략적으로 옳지 않다”며 “관세로 동맹을 압박할수록 동맹국들은 미국이 아닌 다른 선택지를 고민하게 된다”며 “이는 중국의 전략에 오히려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차 교수가 제시한 해법은 명확했다. 그는 “미국이 해야 할 일은 동맹국에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하나로 묶어 중국의 경제적 강압에 공동 대응하는 것”이라며 “집단적 회복력은 중국에 대한 억지 수단일 뿐 아니라, 미국 스스로의 전략적 신뢰를 회복하는 수단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차 교수는 이어 “중국이 일본의 방위 정책 재정립이나 한국의 핵잠수함 논의에 반응하는 방식은 매우 유사하다”며 “경제적 강압은 결국 안보 주권을 둘러싼 선택지를 좁히는 효과를 낳는다”고 말했다.
그는 “집단적 회복력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며 “핵잠이나 방위 전략처럼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경제적 보복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구조라면 그 선택은 지속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동맹과 파트너가 함께 버텨줄 것이라는 신뢰가 있어야만 안보 정책의 자율성이 유지된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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