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흐르는 물결을 가만히 안았다>는 한솔 작가의 사진에세이다.
'자신이 새벽 두 시의 강물을 닮았다거나, 물에 푹 잠겨 있는 듯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나요.'
아무 데나 툭 하고 앉아 멍하니 물결을 바라볼 때가 잦았다. 그러다 위아래로 요동치며 빠르게 흘러가는 물결이 지나간 삶 같다 느꼈다. 파도를 타듯 환희를 느끼는 순간도, 잠수하듯 한없이 가라앉는 순간도 있었기에. 지난 시간이 멀리 흘러가 보이지 않기 전에 그들이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었는지 찬찬히 곱씹어 보고 싶었다.
작가는 몇 해 전 인도를 여행했다. 누구든 자유로이 유영할 수 있는 커다란 바닷속을 닮은 인도에서 그는, 꽁꽁 감춰두었던 자신과 처음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돌아온 후에도 종종 갠지스강에서 홀로 밤 수영을 하는 기분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작가는 잠긴 듯 멍멍한 귀를 하고 글을 썼다. 물에 젖은 글들이 모여 책이 되었다.
작가는 바란다.
"그대를 울렁이게 하는 일들이 끝없는 물결이 되어 밀려왔으면 합니다. 때로는 거친 파도의 크기로, 때로는 잔잔한 호수의 모양으로."

저자 소개
저자: 한솔
새벽의 적당한 우울
휘어지는 눈
누군가를 위해 적은 글
물어도 물어도 동나지 않는 질문들
다정한 말, 간단한 믿음
자연에 동떨어져 있는 시간을 좋아합니다.
자주, 많은 것들과 쉽게 사랑에 빠집니다.
목차
총 228페이지
본문
발가락 사이를 부서지며 빠져나가는 파도처럼 사라져 가는 시간을 흐르는 물결이라 하였습니다. 모두 흘러가 까마득히 눈에 보이지 않게 되기 전에 가만히 그 시간을 껴안아 주고 싶었습니다.
흘러간 이들도 일들도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니 구석 어딘가 묻어 지워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하얀 도화지인 줄로 알았던 내가 어느새 그들로 잔뜩 물들어 있었습니다.
많은 것들을 쉽게 사랑해 버리는 탓에 눈물을 흘리는 날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행복의 끝에 필연적으로 뒤따라오는 슬픔에 슬픔까지 사랑한다 말합니다. 무언가 나를 또 울게 만들기를, 사랑스러운 것들이 끝없이 등장해서 또 눈물짓게 하기를.
인도에 가 글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몸을 옥죄던 수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나 그대로도 존재할 수 있던 곳. 인도에 있던 불과 몇 해 전의 나와 어제의 나, 그리고 오늘의 나 또한 계속 달라지기에, 감정을 투명히 느끼던 내가 흘러 사라지기 전에, 여러 나라를 부유하던 돌아온 날들을 유영하는, 남이 아닌 나로서의 울렁이는 순간들을 남깁니다.
- '물결을 안으며' 중에서 -
해가 뜬지 오래지 않은 아침, 모닥불이 피워진 가트 앞에 하나둘 언 몸을 녹이려 모여든다. 사람들도 강아지들도 한데 모여 불을 쬔다. 따끈한 짜이 한 잔도 역시 빠질 수 없다. 빤데이가트 바로 앞, 열흘간 머무르던 게스트하우스, 짜이를 마셔 몸을 데운 후에는 숙소에 돌아와 강아지 아이와 주인 쿠미코 할머니의 손녀 스니하와 옥상에 올라간다.
옥상에 잘못 걸린 연을 날려보고 함께 다람쥐를 보다 단상에 올라가 조례를 시작하는 스니하. 올해 10살이 되는 그는 학교에서 배웠는지 보이지 않는 국기에 경례를 하고 국가인 듯한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른다. 내게도 노래를 부르라 하여 머리 어깨 무릎 발을 불러 보았다. 그리스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다 같이 부를 때는 다들 즐거워하던데 초등학생이라 그런지 도통 먹히지 않는다.
함게 노래를 부르다가 스니하의 수업이 시작했다. 학생은 오직 나뿐. 그가 유일한 학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은 왜 사는 걸까요?"
- '작은 철학자' 중에서 -
운다. 운다는 것에 애달프게 되어버렸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슬프고 아픈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부정적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는 필히 그전에 그 정도의 긍정적 감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알게 된 후로는 울 수 있는 내가 좋았다. 아직은 내가 울 수 있는 사람이구나. 눈물을 흘릴 정도로 누군가에게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눈물이 아무 때나 나오는 것은 아니니까, 함께 했던 사람들과 헤어지는 게 아쉽거나 그리울 때, 누군가 내가 한 기대를 저버리거나 실망을 주었을 때, 서운한 점을 서로 얘기하다 상대방의 기분이 탁하고 풀렸을 때, 이 모든 눈물이 나오는 상황에는 그 대상에게 내가 큰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면 나는 그것으로 되었다. 그와 더는 함께 할 수 없고 예전 같은 사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순간의 우리에게 행복한 기억이 되었고 내 마음 온전히 쏟을 수 있었던 대상이었기에, 지금이 어떻든 나는 그것이면 되었다.
- '울게 하는 것들' 중에서 -
작은방이 다 비치는 거울 앞에서 문밖 소리를 쳐다보고 있다. 가끔은 이 집에서의 위치가 집주인 할머니의 눈치를 보는 하숙생이라거나, 영화 속 눈에 띄지 않고 지하에 숨어 살던 기생충의 위치가 아닐가 했다.
잠의 숨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새벽에 집에 와 혹여 두 분이 깰까 조심히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는, 식탁에 마주 앉아 밥 다운 밥을 뜬 지는 기억에도 없고, 새벽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나와 라면이나 참치 통조림을 꺼내는, 와중 신경 쓰는 소음이 또 그들의 잠을 방해하지는 않을까.
해가 다시 질 준비를 할 때, 문밖의 달그락거리는 그릇과 숟가락의 마찰 소리에 어렴풋이 깨도 문을 열지 못한다거나. 컴컴한 하루를 시작하려 겨우 몸을 을으켜 나갈 준비를 할 때, 고된 하루를 마치고 티브이를 보며 웃는 남녀의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다거나.
우리로 묶지 못하는 너와 나 사이에 자주 시차가 존재했다. 전혀 다른 리듬을 가진 곡을 연주하듯, 전혀 다른 시간을 지닌 사람들은 지구의 반대편을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서로의 곁에 가닿지 못했다. 밤을 사는 것에 대한 구구절절은 그래도 한번 일찍 일어나 보는 건 어떠냐는 무심한 말로 간단히 부정당한다. 이런 이질감은 태아 시절부터 알고 지낸 중년 남성의 언어 속에도 매번 존재한다. 치명적이지 않아 참고 걷지만 자꾸 거슬려 전봇대에 기대 신발을 벗고 빼내야 하는 풀 가시처럼 문득문득.
새벽은 시커먼 물에 잠겨 푹 절여져 있다. 발을 움직이려 하거나 벗어나려 하면 둔하게 발목을 당겼다. 밤의 수영이 좋아 밤이면 늘 물에 몸을 던졌다. 보이지 않는 바닷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에 깊숙이 빠지면 목 끝까지 물이 찬다. 때로는 뭍으로 나와 잠시 숨을 고르고 차오르는 물을 뱉어내며 살아야 살아지는 것이다.
- '물은 숨을 막히게 할 때가 있지' 중에서 -
강릉에서 당신과 지낸 숙소는 기와지붕으로 된 아늑한 가옥이었다. 마당에 있던 연못의 물레방아를 당신은 오래 바라보고 있다. 마당 의자에 앉아 당신의 어린 시절을 말해낸다. 중학교 때 배우다 그만둔 피아노를 배워보고 싶다는 이야기. 무서웠던 당신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지천에 많은 소나무 숲을 걷다 향수에 잠긴 당신은 나중에 저렇게 기와가 달린 전통가옥에 살고 싶다 한다. 길을 걷다 말고 당신이 쉽게 걸음을 옮기지 못한 곳은 꽃이 가득 핀 배롱나무 앞이었다.
당신이 파도에 뛰어드는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당신은 물러남에 살금살금 다가갔다 덮쳐옴에 웃으며 뒷걸음질 치기를 한참이나 반복했다. 붉은 티셔츠에 펄럭이는 다홍색 바지를 입은 당신이 푸른 바다에 자꾸만 뛰어드는 모습을 그늘에 앉아 렌즈에 담았다. 당신은 바다에 핀 한 송이의 백일홍. 파도에 꽃잎이 활짝 젖는 줄 모르는.
커다란 호수의 반 바퀴를 걸어 자전거를 빌렸다. 반건조 오징어를 먹으며 호수 한 바퀴를 돌았다. 어둑해진 하늘이 아름다워 당신에게 보라고 말했지만, 당신은 앞만 보기도 무섭다 한다. 언제 그렇게 자전거를 잘 타게 되었냐며 의아해하며.
밤의 바다는 낮의 곰살궂던 바다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가늠치 못할 암흑 앞에서 막대 폭죽에 불을 붙였다. 나눠든 꽃불을 얼마간 보다 바닷길을 걸어 숲으로 돌아갔다. 빛이 없는 길을 대신 하늘이 밝혀 주었다. 하늘의 빛을 헤아리며 근처를 맴돌았다. 들리는 소리는 우리의 발소리와 풀벌레 우는 소리. 그리고 당신의 차분한 목소리가 전부.
애월에 살던 시절 바다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얼마 전 받은 자궁 검사에서 안 좋은 결과가 나왔음을 알리던 전화였다. 육지와 바다로 한참이나 떨어져 있던 내게 걸려온 울음이, 주변 그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던 당신의 불안이 사무쳤다. 늘 당신의 보호를 받으며 당신을 뒤따라 걷던 내가 그제야 당신의 옆에 서게 됨을 알았다.
당신의 곁에서 나란히 땅을 디뎠다. 가마득한 기억 속 잔디밭 옆 보도블록을 걷던 당신과 나. 팔자를 그리며 뒤따라 걷던 일곱의 나에게 길을 따라 일자를 가르며 걸어야 한다고 가르쳤던 서른 줄의 당신.
오랜 해가 흐르고 당신이 오십을 걷는 지금, 비로소 나는 당신과 나란히 발을 맞춰 걷는다. 배롱나무꽃 피는 계절에.
- '배롱나무꽃 피던 계절' 중에서 -
[ⓒ 사회가치 공유 언론-소셜밸류.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