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흡혈공주]는 홍유진 작가의 어른들을 위한 지독한 동화 시리즈 2편이다.
옛날 어느 작은 왕국에 태어날 적부터 몸이 약했던 왕의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공주는 부왕이 백성들로부터 착취한 어린아이의 피로 몸보신을 하면서 자라났다. 하지만 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공주가 마시는 약의 비밀을 미처 알려주지 못했고, 아무것도 모르고 주변에 별 관심도 없었던 공주는 여왕이 된 후에도 계속 금단의 약을 요구하게 된다. 어리석음과 무관심으로 죄를 짓는 공주, 그리고 왕국의 운명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또는 '모르는 일입니다.'는 이미 진부한 정치권 클리셰지만, 과연 당사자들이 진짜로 몰랐다고 해도 무죄일까? [흡혈공주]는 그러한 높으신 분들에게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첫 번째 책인 [컵라면 소녀]와 함께 작업하며 2016년 11월에 패기 있게 공개했으나, 세종예술시장 소소에 들고 나오자마자 '그' 사건이 더욱 강렬하게 터지면서 묻히고 만 비운의 책이다.
직접 폐지를 오려 만든 그림자 인형 삽화는 결코 쉽게 묻히지 않을 강한 인상을 지니고 있다. 대신 기분 나쁜 쪽으로 강렬하기에 어린이, 임산부, 심약자의 주의를 요할지도 모른다.

저자 소개
저자: 홍유진
1인 출판 레이블 [狂傳社]의 전속작가 겸 대표 겸 편집부장 겸 영업부장 겸 알바생. 하필 '유진'이란 이름이 80년~90년대생 사이에선 남녀 불문하고 너무 흔하게 쓰던 것이라, 독립출판을 할 때 책에 저자명을 적어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고민이었다. 그래서 가상의 회사인 [광전사]의 로고를 만들어 붙인 게 지금의 유령출판사 전속작가 겸 대표 겸…(후략) 생활의 시작.
2016년 [컵라면 소녀]와 [흡혈공주]를 시작으로 [망한 여행사진집], [사망견문록] 등의 독립출판물을 제작하였다. 그 중 [망한 여행사진집]은 작가의 민망함을 판 대신 독립출판계에서 약간의 유명세를 벌어들인, 뜻밖의 출세작으로 꼽히기도 한다.
목차
총 92페이지 중에서
본문
"아직 젖을 떼지 않은 어린 아기의 피를 쓰면 효험이 있을 거라 봅니다."
의사의 처방을 들은 왕은 경악했습니다. 아무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래도 남의 집 아이의 피를 보는 건 말도 안 되니까요.
하지만 왕에게 공주는 오직 하나뿐이었습니다. 반면 백성들에게 아기란 어차피 다시 낳으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왕은 어떻게든 나그네 의사의 처방을 따라보기로 했습니다.
- 본문 중에서 -
한 편 전국 각지에서부터 성으로 실어온 아기들은 왕실 요리사들이 잡아서 신선한 피를 받은 후에, 상하지 않게 꿀과 섞어 두었다가 올렸습니다. 매일 저녁 공주의 식탁에는 이 아기 피 꿀술이 빠지지 않았지요.
- 본문 중에서 -
왕이 등을 돌린 틈에, 재단사는 잠시 제가 가진 연장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줄자로 목을 조를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왕의 명줄을 끊기 전에 비명을 들은 사람들이 먼저 오겠지요.
'그럼 이 바늘로 찔러버릴까?'
재단사의 바늘은 길고 날카롭긴 했지만, 사람의 명줄을 끊기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럼 이거다!'
재단사는 날카로운 가위를 손에 꼭 쥐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왕의 목덜미에 힘껏 찔러 넣었습니다.
"컥!"
뒤에거 갑자기 목을 찔린 왕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 본문 중에서 -
"모르시는 게 우리에게도 좋을 것이오. 폐하는 어릴 적부터 이미 피 맛에 길들어 계신 분. 이 비밀을 우리끼리만 꽉 쥐고 있다면, 폐하도 약술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언젠가 폐하가 약술의 비밀을 알게 되신다면……."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으실 분이외다. 아무리 선왕께서 입단속을 시키셨다 해도, 진작 궁금하셨으면 조금만 아랫것들에게 귀를 기울여도 충분히 알 수 있었던 사실이오. 거의 알고도 모른 척 하고 계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만큼 바깥 일엔 워낙 관심이 없으신 분이니, 그런 건 걱정하지 마시오."
- 본문 중에서 -
처음으로 혈세를 걷은 날, 여왕의 식탁에는 다시 아기 피 꿀술이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약술을 만들어본 지 너무 오래된 늙은 요리사가 실수하고 말았어요. 여왕이 피를 마시다가 술잔 바닥에 배냇머리 한 올이 가라앉은 걸 본 것이죠.
"어머, 이게 뭐람." 여왕은 아무 생각 없이 머리카락을 꺼내 시종들에게 보였습니다. "이게 대체 어디서 나온 게냐?"
"앗, 송구합니다. 폐하, 그건……."
"누가 이런 지저분한 실수를 했냐 이거야." 여왕은 머리카락을 던지며 명했습니다.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른 자는 왕실 요리사의 자격도 없도다. 본보기를 보이거라."
그날 조리장의 목은 단두대에서 날아가 버렸지만, 대신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꿀술의 재료가 까발려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여왕의 병도 그저 술 한 모금에 씻은 듯 날아갔으니 여러모로 잘된 일이지요.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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