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이란 영화에 나레이션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은 어떻게 읽혀질까.

정치 / 허상범 기자 / 2019-10-30 20:14:07
<언젠가 머물렀고 어느 틈에 놓쳐버린> 저자 가랑비메이커


책 소개


[언젠가 머물렀고 어느 틈에 놓쳐버린]은 가랑비메이커의 장면집이다.


다음은 본문에 수록된 소개 글이다.


『'내 삶이란 영화에 나레이션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은 어떻게 읽혀질까.' 라는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매일의 삶 가운데 우리가 지나온 장면들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편의 영화도 결국 숱한 장면들의 연속이다. 그 어떠한 서사도 찰나의 순간들을 지나오지 않고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무심한 듯 지나쳐왔던 순간들이 모여서 결국 하나의 삶을 만들어간다. 돌아보면 언제나 긴 여운을 남기는 것들은 언제 어디서든 만나고 헤어질 수 있다고 믿었던 사소한 얼굴들이었고 낮고 고요한 공간이었으니까. 여섯 계절을 지나며 내가 혹은 당신이 지나쳐 왔을 장면들을 기록했다. 순간이라도 시간 속에 머물던 장면들을 놓치지 않기를 바라며. 이 책이 당신의 영화 속 한 켠에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끝나지 않을 러닝타임 가운데 몇 차례 더 넘겨질 수 있기를.』


[출처: 오혜]

저자 소개


저자: 가랑비메이커


문장과 장면들 그리고 흐르는 모든 것들을 애정한다. 무엇도 영원히 머물 수 없음을 알기에 깊은 어딘가에 남기고 싶은 것들이 많다. 그렇기에 매순간, 문장들을 읊으며 장면들을 옮긴다.


목차



총 212페이지


본문


익숙한 거리에 비가 오면 왠지 새로운 마음이 들어.


무엇이든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비가 오는 날, 그녀와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되묻게 되는 이야기로 운을 때는 그녀를 바라보는 일. 부스스한 머리칼, 습한 기운에도 잔향이 남은 플로럴 향. 단정하게 정리된 손끝으로 탁탁, 테이블을 치는 습관. 늘 같은 그녀지만 어딘가 다른 그녀를 바라보는 일은 비 오는 날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바꿔놓았다. 성가신 것들을 질색하던 그가 작은 우산에 한쪽 어깨를 기꺼이 양보하고 서늘한 냉방 아래 덜덜 떨며 마시는 뜨거운 차 한 잔의 위안을 알게 된 건 모두 그녀 때문이었다.


어디서나 총명하게 반짝이던 그녀의 두 눈이 어딘가 힘을 잃어가는 듯해 보일 때나. 언제나 꼿꼿하게만 보이던 그녀의 실루엣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할 때면 후두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전후 상황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컸지만 그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녀의 무언가가 맑은 하늘에 잿빛을 데려오는 것 같았다.


비가 내릴 때의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온전해 보였다. 어딘가 슬퍼 보이기도 했지만 편안해 보였다. 마치 이전의 그녀는 그녀가 아닌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그녀로서 온전해 보였다. 그는 그런 그녀를 보는 것이 좋았다. 마주한 테이블 사이의 간격을 사랑했다.


- 비의 대화, 35페이지 중에서 -


사람들을 좋아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녀이지만 만남은 하루에 한 번으로 정해둔 것이 그녀만의 간격이라고 했다.


작업이 시작되면 꼼짝도 안 하는 탓에 마감을 하고 나면 밀려 드는 약속들이 이제는 당연한 패턴이 되어버렸다는 그녀. 반가운 연락들에 행복해지기도 잠시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일곱 얼굴에 손가락을 걸고 나면 다시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 그녀는 야속한 사람이 되고 만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간격을 줄일 수가 없다고 했다.


그녀에게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그간 마주하지 못한 사이의 삶을 슬쩍 들춰보는 경험. 그 만남의 공백이 길어질수록 들춰봐야 하는 범위도 깊이도 무궁해진다고 했다.


그렇기에 만나기 전과 헤어지고 난 후, 그 하루를 모두 그에게 내주어야만 만남이 온전해질 수 있다고. 그것이 느리지만 깊은 그녀만의 소화라고 했다.


언젠가 그리운 마음들을 미룰 길이 없어, 틈 사이를 메우듯 만남을 이어갔던 그녀는 혼란스러워졌다고 했다. 가볍게 날려 보냈던 이야기와 쉬이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 모두가 뒤죽박죽.


마주했던 얼굴들과 나눴던 시간이 다시 곱씹어 볼 새도 없이 흘러가 버렸다고.


반가운 얼굴들에 배부르기도 잠시. 체한 속을 달랠 길이 없어 다시 쏟아내고 흩어진 퍼즐 조각들을 맞춰보다, 그렇게 공허한 새벽을 맞이했다고.


- 그녀의 간격, 69페이지 중에서 -


열 일곱의 여름밤, 언제까지나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나이니까. 뻑뻑해진 두 눈을 비비면서


굳은 살 박힌 중지와 약지를 모른 척하면서


꾹꾹 눌러쓰는 페이지들, 흘러가는 모든 순간들.


그렇게나마 붙잡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 순간을 애정해, 107페이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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