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에 관한 글을 써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지 일주일이 넘게 지났다. 아, 이주일이 넘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걸 보니 지금 살짝 취한 상태인가보다. 사실 첫 원고를 쓴지는 꽤 되었다. 글을 쓸 때는 역시 위스키를 마셔줘야 할 것 같아 무게감있고 스모키한 위스키를 마신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을 뿐. 몇 잔의 위스키를 연료삼아 적어낸 문장들은 필요 이상으로 무겁고 진중했다. 물론 이를 눈치챈 것은 다음 날 메일로 원고를 보내기 직전이었고, 맨정신으로 취중에 쓴 글을 읽게 된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제출을 미루게 되었다.
어떤 술을 마시며 글을 써야했던 것일까. 꽃내음이 물씬 피어오르는 달콤하고 화사한 꼬냑을 마셨다면 내 글도 좀 더 매력적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거친 버번 위스키를 마시면 좀 더 거침없는 글을 쓰게 되고, 진 토닉이나 진 피즈를 마시며 글을 쓰면 산뜻하고 상쾌한 글을 쓰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애초에 맨 정신으로 글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내가 문제라는 생각은 들지만, 술 이야기를 하면서 술을 마시지 않는 것도 모양새가 안 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왕 이렇게 된거 매번 다른 술을 마시며 글을 써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집에 널려 있는게 술이니까.
지금 글은 맥주를 쓰며 마시고 있다. 아, 오타가 났지만 이대로 내버려둬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는 맥주를 마시고 있다. 오렌지 껍질과 고수 씨앗을 넣어 만든 벨기에 스타일의 밀맥주인 블루 문. 호가든과 같은 스타일의 맥주로, 편의점에서도 네 캔에 만원이면 살 수 있는 저렴하고 맛 좋은 녀석이다. 난 원래 호가든을 좋아하긴 했지만 블루문의 라벨이 더 예쁜 탓에 빠르게 블루문으로 갈아탔다. 궁금해서라도 사볼 수밖에 없는 디자인이랄까. 물론 맛도 좋다. 내가 평가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맛이 좋고 구하기도 쉬워서 집에 쌓아 두고 마시는 편이다. 오렌지 껍질의 향긋하고 산뜻한 향과 밀맥주 특유의 달달한 바나나의 풍미가 잘 어우러져 있어 새콤달콤하면서도 가볍고 시원하게 마실 수 있다. 이런 맛을 싫어할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혹시 있다면 제가 대신 마셔드릴 테니 n캔만 주십시오 헤헤…
맥주를 마시며 글을 쓰면 맥주가 미지근해지기 전에 빠르게 글을 마무리 짓고 재빨리 원고를 제출해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맨정신으로 돌아가버리기 전에, 순식간에 저질러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멀쩡한 정신상태에서 내 글을 읽어보는 수치플레이를 예방할 수도 있고, 원고가 더 이상 밀리는 일도 없을 테니까. 게다가 난 맥주를 마신 상태로 기분 좋게 이른 잠에 들 수 있어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내가 고작 맥주 한 잔으로는 취하지 않는다는 것과, 집에 블루문 맥주가 잔뜩 쌓여있다는 것. 첫 잔을 비운 나는 묘한 갈증을 느끼며 다시 블루문 한 캔을 더 따게 되었다. 역시 맥주는 1리터는 마셔줘야지. 살짝 몽롱해지는 기분이 든다. 아까 낮술을 해서 그런지 1리터의 맥주로도 충분히 취하는 느낌이다. 마침 밤 열두시를 넘겼다. 늦은 밤, 술김에 과제를 제출하는 건 대학생때도 자주 하던 행동이라 그런지 거리낌이 없어진다. 좋아, 이대로 제출이다. 부디 다음 글도 쓸 수 있게 되길!
[뮤즈: 유승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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