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슬픈 기억은 행복의 홍수 아래 가라앉게 해>는 이채은 작가의 에세이다.
책은 그저 지나가는 하나의 삶을 조금 더 애틋하게 새기는 방법, 기억을 기억하기 위한 기록, 오늘을 살아가게 한 순간의 기록을 담았다.
작가는 책을 통해 순간의 일상이 특별해지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때 그 순간의 음악, 떠오르는 영화 등 기억을 기억하는 방법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독자들에게 위로와 공감이 되어준다.
이채은 작가의 에세이 <슬픈 기억은 행복의 홍수 아래 가라앉게 해>를 읽어보고 자신만의 특별한 일상을 기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저자 소개
저자: 이채은
누군가를 웃게 하지는 못할지언정 누군가의 눈물은 닦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나의 서툰 글이 그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차
기억을 기억하기 위한 서른가지 질문
1. 오늘 두 번 이상 반복해서 들은 노래가 있나요? / 2. 오늘 맛있다! 라는 말을 하게 한 음식은 무엇인가요? / 3. 오늘 당신에게 상처를 준 말은 뭐예요? / 4. 그 상처에 위로가 된 것은 무엇인가요? / 5. 오늘 기억에 꽤 오래 남을 만한 사람을 만났나요? / 6. 하루 중 당신을 위로하는 시간은 언제인가요? / 7. 오늘 갑자기 생각난 옛사람이 있나요? / 8. 오늘 우연히, 그러나 운명 같은 순간이 있었나요? / 9. 가끔 당신을 괴롭히는 차가운 기억이 있나요? / 10. 그럼에도 나를 따듯하게 해주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 11. 오늘 당신이 용기 내서 한 말은 무엇인가요? / 12. 오늘 혼자서 무엇을 했나요? / 13. 오늘 누군가와 함께 한 일이 있나요? / 14. 오늘 생각지도 못하게 받은 연락 한 통이 있나요? / 15. 오늘 당신이 품은 아쉬운 마음이 있나요? / 16. 오늘 품은 그리운 마음이 있나요? / 17. 오늘 깨달은 나의 사소한 장점은 뭐예요? / 18. 당신의 단점은 무엇인가요? / 19. 오늘 본 드라마나 영화에서 마음을 움찔하게 한 대사가 있었나요? / 20. 하루 중 당신이 좋아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 21. 행복하다고 말한 적이 있나요? / 22. 오늘 곱씹게 된 말 한마디가 있나요? / 23. 다음에 다시 찾아가겠다고 마음먹은 장소가 있나요? / 24. 당신의 취향은 무엇인가요? / 25. 당신의 마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 26. 아직 보내지 못한 편지 한 통이 있나요? / 27. 무기력한 하루에 대처하는 방법이 있나요? / 28. 가지고 있는 물건 중 절대 버리지 못할 물건이 있나요? / 29. 오늘 생긴 당신의 버킷리스트는 뭐예요? / 30. 오늘 당신에게 잊지 못할 순간이 있었나요?
본문
천천히 새긴 기록이 차곡히 쌓여
잔잔하게 기억되는 생을 살아가가겠다고,
그 생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어쩌다 한 번은
그 위로가 누군가의 하루를
버티게 했으면 하는 거창한 바람도 품었다.
그러니 나는
앞으로 살아가는 날들의 사소한 순간을
악착같이 기록해야지, 그리고 기억해야지
- 본문 중에서 -
재생목록에 담긴 몇 개의 곡에는 좋아하는 취향이 담긴 전주와 마음이 가는 가사뿐만이 아닌 그 어느 날의 장면이 담아져 있다.
태어나 처음, 당장이라도 쏟아져 나를 덮칠 것만 같던 은하수의 수많은 별을 품고 있던 사하라 사막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곳에서 들은 이적의 <Rain>에는 아무것도, 아무 불빛도 없는 사막에서 노래가 흘러나오자 여행자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고요한 밤이 있고,
발리의 어느 펍에서 흘러나온 Angus & Julia Stone의 <Paper Aeroplane>을 들을 때면 모두가 즐거운 그곳에서 혼자만 울던 나를 위해 함께 울어주던 친구가 항상 떠오르고,
Post Malone의 <Sunflower>에는 호주의 끝없는 도로를 달리며 마주한 붉게 지던 그날의 노을이 담겼고, 단지 위로받고 싶다는 이유로 갑자기 떠난 제주 여행 마지막 날, 우연히 재생 목록에 추가된 환상약국의 <Scarlet>에는 비가 온 뒤 맑게 갠 함덕 해변을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한없이 걷던 순간이 담겼다.
이렇게 어떠한 기억이 담긴 노래가 우연히 들려올 때면 나는 의도치 않게 그날의 시간으로 잠시 젖어 든다. 어떤 순간은 그날 찍은 사진이나 영상보다 노래를 들을 때 더 선명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우연히 흘러나온 노래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좋아하는 장면을,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을 마주하게 되면 일부러 노래를 하나 고른다.
이렇게 하면 이 노래가 세상에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기억하고 싶은 오늘을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 내가 기억을 기억하는 방법 중 하나는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 일이 되었다.
그러니 오늘 어떤 노래를 두 번 이상 들었다는 건 그 노래가 내 취향을 한껏 건드렸다는 말이자,
지금의 순간이 오래 기억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해졌다는 것이며, 그러했다는 건 오늘 하루가 썩 나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 '1. 오늘 두 번 이상 반복해서 들은 노래가 있나요?' 중에서 -
제주는 참 이상했다. 국내 여행임에도 비행기까지 타고 가지만, 그다지 특별한 게 없다 싶다가도 예상치 못한 울컥함 같은 걸 쥐여주기도 한다.
온도가 서울보다 한참은 따듯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온 내게 다가오는 몇몇 사람들은 꽤 높은 기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뿐만이 아닌 고요한 바닷가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 길 가다 우연히 발견한 무인 책방, 혼자 먹는 물회에 막걸리 한잔이 외로움이 아닌 낭만으로 느껴지는 식당의 분위기, 주인의 얼굴과 꼭 닮은 작은 가게들. 모든 것의 온도는 내가 평소 느꼈던 것보다 조금 더 뜨겁게 와 닿았다. 어쩌면 제주의 기온이 서울보다 항상 높은 까닭은 지리적, 기후학적 원인이 아닌 따듯하고 작은 것들이 모이고 모여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막연히 위로가 필요하다고 갑자기 떠나온 이 제주에서 한 번에 괜찮아질 만한 큰 무언가는 없었지만, 작고 소소한 따듯한 것들이 하나씩 모여 시나브로 괜찮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내내 나쁘지 않다가 가장 기대했던 마지막 날 엉망이 되고 말았다.
제주에 머무는 3일 중 이틀은 구름이 가득하고, 마지막 날 하루는 햇살이 쨍할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그 말에 나는, 오전이었던 서울 가는 비행기를 늦은 저녁 비행기로 바꾸는 수고를 더했다. 광합성 하나만으로도 실컷 행복해할 자신이 있었기에, 다음 날 출근임에도 불구하고 늦게까지 제주에 있는 것쯤이야 충분히 괜찮았다.
그렇게 마지막 날이 되었고, 숙소 체크아웃을 하려고 짐을 싸는데 선물 받은 소중한 목걸이가 안 보이는 게 아닌가. 그 목걸이를 찾겠다며 몇 시간을 허둥대는 바람에 오전 계획을 허투루 다 날려버리고 말았다. 아점으로 먹으려던 돈가스를 늦은 점심으로 먹어야 했다. 그렇게 부랴부랴 돈가스집을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는데, 그 순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미친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는 우산도 없었다.
그래도 뭐 괜찮다고, 정류장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면 된다고 생각하며 버스에서 내렸지만, 정류장 근처에는 편의점은커녕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 흔한 택시도 나타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고, 그렇게 한참을 서 있느라 정류장 안으로 잔뜩 튄 비에 신발이며, 바지며 다 젖고 말았다. 다 젖고 나서야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탈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택시를 타고 식당에 도착하니 야속하게 날 기다리고 있는 건 바삭한 돈가스가 아닌, <오늘 영업 쉽니다>라는 팻말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더는 '그래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어찌할 거냐며, 다른 맛집으로 가주냐고 묻는 택시 기사 아저씨의 물음에 이미 지쳐버린 나는 그냥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답했다.
그 택시 안에서 "이럴 줄 알았으면 예정대로 오전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 내 방 침대에서 편히 쉴 걸···."이라는 후회를 몇 번이나 곱씹었는지 모른다.
축축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왔지만 이제 어딘가 새로 가야겠다는 의욕도, 시간도 없었기에 공항이나 일찍 가서 쉬자며 맡겨놓은 짐을 챙겨 나왔다.
그렇게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하염없이 쏟아지던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그 순간 고새 약간의 의욕이 생겨 냉큼 하차 벨을 누르고 말았다. 그곳은 함덕이었다.
배낭을 메고 돌아다니기 무리가 없을 정도로 잦아든 비에, 식당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이미 꽤 젖어버려서 비가 얼마큼 오고 말고는 큰 의미가 없긴 했지만.
그렇게 해변을 걷다가 마침 브레이크 타임이 막 끝난 식당으로 들어가 조금 늦은 점심을 먹었다.
어쩌다 오게 된 식당치고는 여행을 오기 전 수첩에 빼곡히 적어놓은 맛집들보다 훨씬, 아니 이번 제주 여행 통틀어 가장 맛있는 한 끼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 전까지 불만 가득했던 내 마음에 슬쩍 콧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서니 더 이상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골목을 걷다 아늑한 분위기가 가득한 카페를 하나 발견했다. 좋아하는 취향의 인테리어로 가득 채워져 있고, 고소한 커피와 달달한 케이크가 있는 공간이었다.
한참을 카페에 앉아있는데 처음 듣는, 그렇지만 단숨에 내 마음을 건드린 노래가 흘러나왔다. 카페 직원에게 제목을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아, 핸드폰을 쥔 손을 천장 가까이 번쩍 들어 노래를 검색했다.
그렇게 찾은 노래의 제목은 환상약국의 <Scarlet>.
그 순간 창밖 너머로 거짓말처럼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고민할 틈도 없이 얼른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어폰 속 흘러나오는 <Scarlet>을 들으며.
뭉게뭉게 떠 있는 구름과 반짝이는 바다와 노란 기가 감도는- 해 질 녘의 하늘 아래 서 있는 지금은 '완벽하게 행복한 여행'이라는 말 말고는 그 무엇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순간 하나만으로도 나는 제주에 오길 참 잘했다고, 안도하는 숨을 푹 내쉬었다.
언제나 그렇듯 낯선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사소한 순간은 충분한 위로가 된다. 그리고 그 위로는 항상 마지막이 되어서야 떠나기 싫을 이유를 건넨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순간은.
- '8. 오늘 우연히, 그러나 운명 같은 순간이 있었나요?'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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