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도서관이 등장하고, 우연히 사서가 주인공이 되어버린 소설
[우연의 소설] 저자 강민선
오도현
dhehgus@naver.com | 2020-04-01 15:25:00
책 소개
<우연의 소설>은 강민선 작가의 단편 소설집이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 <상호대차: 내 인생을 관통한 책>, <도서관의 말들>에 이어 이번에는 도서관을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 다섯 편을 모았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쓰고 나니 우연히 모두 도서관이 등장했고, 우연히 사서 혹은 사서가 되고 싶은 사람이 주인공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책의 제목은 <우연의 소설>이 되었다.
작가는 말한다.
"한 시절을 과거로 보내듯 오랜 시간 동안 써온 소설을 세상에 내보냅니다. 다음번엔 절대로 도서관 얘긴 쓰지 말아야지, 이제 다른 얘기 좀 해야지, 하고 예전에 했던 다짐을 또 하며, 다음엔 어떤 우연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소개합니다."
저자 소개
저자: 강민선
목차
해빙기 10 / 숲으로 40 / 흔적들 80 / 가까이 120 / 시위 148
본문
1
"응, 언덕 꼭대기에 있는 낡은 석조 건물."
수아는 전화를 끊고 자료실을 나와 정문 쪽으로 갔다. 3분쯤 뒤에 은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정문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수아는 은설에게 손을 흔들었다.
"무슨 도서관이 산꼭대기에 있어?"
"미안, 언덕이 아니라 산이지 산."
"미안하긴, 난 좋은데. 공기도 좋고."
아직 10월 말, 한창 가을이었지만 은설의 옷에서 겨울 냄새가 났다. 이름 때문인지 은설에게서는 언제나 겨울 느낌이 났었다는 것을 수아는 문득 떠올렸다. 그것이 상당히 오래전 기억이었는데도 다시 만나니 이토록 생생했다. 은설을 만났던 겨울은 대체 몇 해 전이었을까.
"오랜만이다. 수아야, 잘 지냈어?"
수아는 은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은설은 때 이른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오후의 밝은 햇빛에 보풀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수아는 시선을 돌렸다.
"들어갈까?"
은설은 수아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네가 있는 도서관이구나! 멋있다아."
은설은 연신 두리번거리며 작게 감탄했다. 수아에게는 하등 멋있을 게 없어 보이는 도서관이었다. 여기서 꼭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면접을 보러 왔던 그날 하루뿐이다. 수아는 은설보다 반걸음 정도 앞장서서 걷다가 은설이 멈추면 같이 멈췄다. 은설의 아이 같은 시선을 천천히 따라 가다가도 다음 일정 때문에 촉박하다는 사실을 상기하곤 먼저 움직였다.
수아는 은설을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블랙? 아님 믹스?"
"음, 아침에 마시고 왔지만, 믹스. 왠지 도서관에 오면 믹스를 마셔줘야 할 거 같아."
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설은 변한 게 없었다. 말의 속도, 음색, 웃음기와 눈빛까지. 도서관에 오면 믹스커피를 마셔줘야 할 것 같다는 말은 고등학교 때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매일 밤 10시 50분, 마감 10분 전 안내방송이 나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읽었던 무수한 책들.
그때만 해도 수아는 자신이 도서관 사서가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을 뿐더러 사서가 이런 일을 하는 줄도 몰랐다. 몸은 하루 종일 도서관에 있지만 책 한 장 읽을 시간이 없고 허구한 날 문화강좌 강사 섭외와 회원 모집에 허덕이게 될 줄은.
"총 8회야. 강좌 이름은 이은설 작가의 소설창작반."
수아는 은설을 살피다 덧붙였다.
"더 좋은 게 있으면 바꿔도 되고."
은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깔끔하고 좋아. 소설창작반."
은설은 만족스러워 하는 얼굴이었다.
"그래, 프로그램명은 그렇게 하고, 대상은 성인. 성인의 폭이 넓어서 이삼십 대부터 일흔 넘은 어르신들까지 다양한데, 내 생각엔 한 세대에 집중하는 것보다 전반을 다 다뤘으면 좋겠어. 어때?"
이번에도 은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은 꾹 다물고 있어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수아는 더 묻지 않았다.
"시간대는 언제가 좋아? 일주일에 한 번씩 수요일 저녁쯤이 적당할 것 같긴 한데."
"그건 왜?"
"야간 프로하려면 야근해야 하잖아. 야근하기엔 수요일이 그래도 나은 거 같아서."
수아는 자신의 말이 이기적으로 들릴 것을 의식하면서 대답했다.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수요일은 공공기관이 정한 문화의 날이었다. 수요일에 입장하면 할인해주는 공연이나 행사가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도서관에서도 수요일마다 문화행사 한두 가지 씩은 의무적으로 해야 했다. 은설에게는 두 번째 이유를 댔어도 좋았을 것을, 하고 수아는 후회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난 다 괜찮아."
은설이 대답했다.
"수요일도 좋아."
은설의 말은 언제나 웃음으로 끝났는데 이번에는 그 웃음의 끝이 묘연하게 사라진 것 같다고 수아는 생각했다. 그것은 아마도 이제 마지막으로 꺼내야 할 강사비 때문에 되레 느끼는 감정인지도 몰랐다.
"강사비는 규정대로 나가. 시간 당 5만원인데 두 시간짜리니까 회당 10만원."
수아는 지금까지 숱하게 말해온 매뉴얼대로 은설에게 말했다. 강사의 지위나 경력에 따라 정해진 강사비가 있었다. 은설이라면 가장 낮은 금액의 강사비를 주는 게 맞았다.
"다 하면 80만원이네? 책으로도 그 돈은 못 벌어. 덕분에 먹고살겠다."
은설은 활짝 웃어보였다. 수아는 은설이 일부러 과장하며 말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해빙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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