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지망생들의 삶을 담은 이서현 작가의 단편 소설집
[망생의 밤] 저자 이서현
김미진 기자
rlaalwls@naver.com | 2020-04-01 15:31:00
책 소개
<망생의 밤>은 이서현 작가의 단편 소설집이다.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지망생의 시간이 있다.
카메라 테스트를 앞두고 동상에 걸려버린 기자 지망생, 작업실에서 쫓겨나 거리를 헤매는 보조 작가, 인형 뽑기에 집착하는 백수, 운수 하나에 울고 웃는 작가 지망생까지.
보통의 사람이라면 제 인생을 찾아갔을 삼십 대, 그 중심에서 여전히 꿈꾸는 이들의 삶을 다룬다.
이서현 작가의 단편 소설집 <망생의 밤>은,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꿈꾸는 이들의 눈물겨우면서도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처절한 시도들을 모은 단편집이다.
저자 소개
저자: 이서현
목차
나잇값 07 / 한여름의 동상 015 / 운수 좋은 날 025 / 리얼리티 쇼 035 / 누구에게나 오는 기회 043 / 뽑기의 달인 051 / 망생의 밤 063 / 풍악을 울려라 083 / 이모티콘의 여왕 095 / 완벽한 절망 103 / 과거를 묻지 마세요 113 / 자니? 121 / 부업 127 / 복이 참 많으세요 135 / 라이프 컨설턴트 149 / 일단 한 번 봅시다 163
본문
거울 앞에 선 유월은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양쪽 볼에 붉은 네모가 떡하니 남아 있었다. 눈을 비벼봐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진정하자. 유월은 심호흡을 한 뒤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이럴 땐 어떡해야 하는 걸까. 따뜻한 물로 씻어야 되나, 차가운 물로 씻어야 되나, 주저하다 미지근한 물로 씻었다. 세수를 하고 난 뒤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볼 위의 붉은 네모는 여전히 선명했다.
남은 시간 세 시간.
침착하자. 별 일 아니다. 살짝 붉을 뿐이다. 유월은 속으로 되뇌며 빠른 속도로 화장을 해나갔다. 토너로 얼굴을 닦아내고 에센스, 수분크림, 선크림, 파운데이션을 바른 뒤에도 붉은 네모는 사라지지 않았다. 재빨리 다시 세수를 하고, 평소 바르지 않던 프라이머와 베이스까지 챙겨 발랐다. 살짝 희미해진 것 같기도 했다. 이내 다시 들여다 보았을 땐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유월은 폰을 집어 들고 셀카를 찍었다. 구린 화질에도 선명하게 붉은 네모가 찍혔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망했다.
곧장 검색창을 켰다. 얼굴 붉은기, 붉은 자국, 얼음 화상, 얼음 마사지, 온갖 키워드를 쳐보았지만 화상엔 얼음을 대면 안 된다는 둥 냉찜질과 온찜질을 반복하는 게 좋다는 둥 필요 없는 정보만 가득 나왔다. 도무지 방법이 없는 걸까. 세상엔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인력으로 할 수 없는 일, 정신건강을 위해 말끔히 포기해야만 하는 일, 그렇다 할 지라도 이번 만큼은 포기할 수가 없다. 세 시간 안에 기필코 피부를 되살려야만 한다.
눈물이 나려는 순간 글 하나를 발견했다. 수술 후 붓기를 빼기 위해 얼음 마사지를 계속 하고 있었더니 간호사가 들어와 동상에 걸릴 지 모르니 그만 하라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동상? 마사지로 동상을 입기도 한다는 건가?
어제 외출에 앞서 유월은 화장솜을 녹차에 젖셔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올해 들어 가장 더운 날이라는 뉴스를 본 직후였다. 팩보다 효과가 좋다는 말에 좀 더 부지런을 떨어보기로 한 것이다. 돌아와서 화장솜을 볼에 올렸는데, 그 광경이 계획처럼 아름답지는 않았다. 꽝꽝 얼어붙은 화장솜은 제대로 붙지도 않았을 뿐더러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차가웠다.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를 악물고 굳이 얼굴에 올려 놓았다. 안 되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딱 그 짝 아닌가.
- '한여름의 동상' 중에서 -
평소라면 별 게 다있다며 넘겼을 터였다. 밤이 깊었기 때문인지, 하루종일 맴돌던 엄마의 말 때문인지, 온갖 상념에도 털어놓을 사람 하나 없기 때문인지 홀린 듯이 신청했다. 참가비를 입금한 지 오 분이 지나지 않아 환영한다는 답장을 받았다. 비로소 할 일을 했다는 듯 그제서야 잠들었다.
"완전 구려."
"왜?"
"왜긴 왜야, 칙칙하잖아. 패배자들끼리 신세한탄 하는 것도 아니고."
은혜는 컵 밖으로 튀어 나온 생크림을 손으로 닦아 낸 뒤, 행주에 곧장 슥슥 닦았다. 평소라면 제발 위생관념 좀 챙기고 살자고 했을 테지만 '패배자'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심하다. 아직 안 됐다는 게 영원히 안 된다는 말은 아니잖아."
"그럼 뭐가 달라? 아직 안 된 사람끼리 으쌰으쌰하면 신나?"
"밴드 공연도 한데."
은혜는 쟁반 위에 비엔나 커피를 놓은 뒤 벨을 울렸다. 손님이 오든 말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설마 신청했어?"
"설마."
순간 거짓말이 나왔다.
남들이 뭐라하건 제 멋대로 밀어붙이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진 지 오래다. 기나긴 지망생 생활은 없던 눈치도 생기게 만들었고, 어떻게 보일지부터 따지게 되었다. 카페 알바도 그렇게 시작했다. 우아하게 커피를 내리기는커녕 하루종일 설거지를 하며 주부습진을 걱정하고, 주휴수당은커녕 겨우 최저시급을 받으면서도 옷차림에 신경썼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중요한 것부터 챙길 수 없는 게 지망생, 은혜가 말한 패배자의 삶이었다.
오 년 전이었다.
한 편의 시가 내 삶을 구원하리라 믿었다.
요즘 세상에 시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도, 시집으로는 돈을 못 번다는 말도 무시했다. 그 무렵 한 시인이 팬덤까지 생성하며 시집은 물론이거니와 에세이까지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가사까지 쓰기 시작하더니 라디오를 넘어 TV까지 진출했다. 바로 그 길이 내가 갈 길이었다. 물론 나는 시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모든 건 시로부터 시작되었고, 시를 통해 보는 세상이 완전히 다른 세상을 열어 주었다고,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는 답을 준비해두었다. 내 시를 세상이 받아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 생각도 못했다. 누가 봐도 멍청한 짓이었지만 어쩐지 그 멍청함이 내게만 눈부신 세상을 열어줄 것 같았다. 근거없는 믿음은 퇴로를 차단했다. 가끔씩 오는 기회마저도 시를 쓴다는 핑계로 돌아섰다. 그렇게 더는 기회가 오지 않는 삶에 도달했다. 가까스로 카페 일을 하게 되었지만 아르바이트는 아르바이트일 뿐이다. 내일에 대한 보장이 없는 오늘은 한없이 위태롭기만 했다.
"행여나 갈 생각 하지마."
- '망생의 밤' 중에서 -
이별에도 예의가 있다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예의 있는 이별을 당해본 적이 없다. 첫 남친은 세이클럽 쪽지로 이별을 통보했다. 두 번째 남친은 콜랙트 콜로 다시는 전화 걸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세 번째 남친 역시 전화로 이별을 고했는데 일주년 기념일에 당구공 소리를 배경 삼아 만나기 곤란하다고 소리쳤다. 네 번째 남친은 구구절절 문자를 보내고, 다섯 번째 남친은 번호를 바꿨다. 물론 모든 게 갑작스레 일어난 건 아니다.
나 역시 관계가 끝났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다만 마주보고 예의를 차려 헤어짐을 고해야 한다고 믿은 덕분에 선수를 빼앗겼을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 예의를 차리다보면 바보가 된다. 이번만큼은 절대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그 유명한 '카톡으로 이별을 고하는 나쁜년'이 되고 말리라, 결심 또 결심했다. 그렇게 결심한 게 무려 백 일 전이다.
새 이모티콘을 만들었다.
차마 내뱉지 못한, 매일 밤 메시지를 보내지 못하고 혼자 끄적이던 그림이 이모티콘으로 나왔다. 괴로움을 승화시키는 최고의 방법은 수익 창출이다. 이별의 아픔이 가사가 되고 소설이 되듯, 오지 않은 이별이 이모티콘이 되었다. 결코 내가 원하던 삶의 방향은 아니었지만 어쩌겠나, 먹고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 해야지. 이모티콘은 출시 반나절 만에 7위로 뛰어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다들 막 돼먹은 이별에 굶주리고 있었던 걸까. 좋아해야 마땅한 이 순간 어째서 하나도 기쁘지 않은 걸까. 아직 미련이 남은 걸까.
"뭘 그렇게 보고 있어?"
건희는 피곤한 기색이었다. 와이셔츠는 땀에 절어있고, 바지 역시 구깃했다. 그는 퇴근 후 애써 만나려 하면서도 지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점이 나를 더 지긋지긋하게 만들었다.
"새로 출시한 이모티콘."
"그래? 잘 됐네."
그는 손을 뻗어 내 앞에 있는 커피를 들이켰다. 역시나 나를 짜증나게 만든다. 물론 가장 짜증나게 만드는 건 바로 다음에 나올 말이다.
"웹툰은?"
대답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제 할 말을 이었다.
"이모티콘도 좋지만 웹툰에 좀 더 신경써야 하는 거 아냐?"
- '이모티콘의 여왕'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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