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마을에 머물며 18개월짜리 아이와 소소하게 지낸 보름의 기록
[우리가 기억하니까 괜찮아] 저자 정성희
김미진 기자
rlaalwls@naver.com | 2020-03-26 21:47:31
책 소개
<우리가 기억하니까 괜찮아>는 정성희 작가의 여행 에세이다.
책은 작가가 네덜란드 마을에 머물며 18개월짜리 아이와 소소하게 지낸 보름 동안의 기록을 엮었다.
작가는 남편 출장을 따라 이제 막 18개월에 접어든 아이와 함께 보름 정도 네덜란드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행이라고 육아가 갑자기 쉬워지지 않았다. 한창 호기심에 이끌려 행동하는 월령의 아이를 졸졸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지나는 자전거에 치이지 않게, 곳곳에 있는 운하에 빠지지 않게 신경 쓰며 보살펴야 했다. 거기다 이제 갓 '마의 18개월'에 접어든 아이는 여행에서 아주 심하게 떼를 쓰며 울어댔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여행이 주는 특유의 설렘과 여유가 마음을 한결 부드럽게 해주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행의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아이 손을 잡고 걸으며 더 없는 행복을 맛보기도 했다. 힘들지만 행복한, 고되지만 즐거운, 달콤 쌉싸름한 시간이었다.
정성희 작가의 여행 에세이 <우리가 기억하니까 괜찮아>는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의 즐거움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저자 소개
저자: 정성희
목차
프롤로그 11 / 델프트 17 / 조심조심 29 / 오전 산책은 옳다 47 / 18개월의 성장통, 그리고 엄마의 고난기간 63 / 미스트 77 / 여행은 관대하다 87 / 아프지 마 95 / 델프트 속으로 113 / 이렇게 또 만나 133 / 친절한 그들과 불편한 그것 143 / 끝자락 157 / 마지막까지 167 / 에필로그 181
본문
당장 한 달 뒤로 네덜란드 출장 일정이 확정됐다는 남편의 말에 순간 멍해졌다. 언젠가 네덜란드 출장을 갈 것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일정이 잡힐 줄은 몰랐다. 남편은 출장을 가게 되면 같이 가자고 늘 말해왔고, 나는 그러겠노라 늘 답했던 터라 나로서는 당장 한 달 뒤로 비행기 표도 끊지 않은 유럽 여행 일정이 잡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여정은 당연히 '아이도 함께'였다. 아직 두 돌도 되지 않은 아이의 주 양육자인 엄마로서 어딜 가든 아이와 함께한다는 것은 내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비행시간이 12시간이 걸리든, 얼마를 지내다 오든 물리적인 거리나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 어디에 있든 아이와 함께라는 것이 제일이었다. 나의 선택지는 아이와 함께 여행을 가거나 혹은 가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제 갓 18개월에 접어든 아이 입장도 생각해봤다. 18개월 살면서 자신의 일부같이 느껴질 엄마가 갑자기 보름간 사라지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싶었다.
아이와 함께 해외여행을, 그것도 보름씩이나 간다는 말에 걱정해주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의 건강이나 안정, 엄마의 고충을 염려하는 조언들이었다. 어찌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한 번 더 생각해주는 이들의 고마운 충고였다.
물론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이다 보니 챙겨야 할 짐도 많고 신경 쓸 것도 많았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한다는 생각이 너무 당연해서였을까, 한 예민에 한 걱정하는 성격임에도 걱정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대비책들이 착착 떠올랐다. 밥은 20여 종이 넘는 시판 이유식을 골라 사가되 현지식을 적절히 섞어 먹이고, 네덜란드의 가을 날씨가 예상보다 추우면 옷을 사 입히고, 아프면 여행 보험사를 통하거나 현지에서 유학 중인 지인을 동원할 참이었다. 정 급하다 싶으면 SNS로 네덜란드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를 위해서 엄마가 못 할 것은 없으니까. 이렇게 어린아이와의 유럽 여행이 어렵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굳혀졌다.
'여행은 남자가 계획하고 이끈다'라는 일반적인 편견과는 다르게 늘 내가 계획, 조사, 준비 및 실행 등을 해와서 여행 준비가 크게 어려운 것도 없었다. 그저 남편의 출장을 방해하지 않고 아이와 둘이 잘 지내다 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렇게 남편은 남편대로 출장 준비를, 나는 나대로 아이와의 여행 준비를 했다.
- '프롤로그' 중에서 -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젯밤 네덜란드 델프트역에 도착해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어둠을 뚫고 호텔을 찾을 때도 분명 또렷한 정신은 아니었다. 체크인 뒤 품에서 잠든 아이를 호텔 침대에 눕히고 소파에 몸을 던졌다. 몽롱했다. 어릴 적 떨어지는 꿈을 꿀 때나 느꼈던 몸이 붕 뜬 느낌이 들었다. 뭉쳐있던 피가 도는지 얼굴은 물론 손끝 발끝까지 저릿했다. 남편이 뭔가 말을 한다는 것을 귀가 들었으나 뇌까지 전달하지는 못했다. 윙윙대는 남편의 목소리가 아득해지며 기억이 끊겼다.
이렇게 피곤할 만도 한 것이, 오기 전날 새벽까지 짐을 싸느라 밤에 얼마 못 잔 데다 네덜란드에 오는 12시간의 비행 중 잠을 잔 시간도 고작 15분이었다. 새로운 환경을 좋아하는 아이는 비행기 안에서도 잘 먹고 놀았고 잠도 잘 잤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아이를 먹이고 챙기느라 쉴 틈이 없었거니와, 망할 난기류라는 복병도 있었다.
잠든 아이를 배시넷(기내용 아기 침대)에 눕히고 나도 겨우 잠이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승무원이 다가와 난기류가 있으니 안전을 위해 아이를 배시넷에서 꺼내 안아야 한다며 깨웠다. 비몽사몽 간에 아이를 나름 조심히 꺼내 안는다고 했는데 아이는 칭얼대기 시작했다. 다른 승객들에게 방해될까 봐 황급히 아이를 어르고 달래 겨우 다시 잠을 재웠다. 하지만 아이를 다시 배시넷에 눕히지는 못했다. 혹시 또 깨어 울어젖힐까 봐 꼼짝도 못 하고 아이를 그대로 안고 세 시간 동안 있었다. 쪽잠은 홀딱 깨버리고 자세도 불편해져서 괜히 승무원이 원망스러웠다.
거기다 도착 몇 시간을 남겨두고는 비행기가 끊임없이 위아래로 울렁울렁 흔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긴 비행시간은 1시간이나 더 늘어났다. 아이는 잠에서 깬 뒤 아빠는 제쳐놓고 나에게만 안기고 밀치며 치댔다. 기체도 흔들리는데 아이는 내 몸까지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이 와중에 고개를 숙이고 아이에게 이것저것 해주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멀미의 기운이 탁 느껴졌다. 이때라도 약을 먹었어야 했는데, 도착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멀미 기운이 심해졌다. 급하게 승무원에게 멀미약을 요청해 먹었지만 이미 늦었다. 도착 한 시간 전 화장실 앞에서 한 번, 그리고 비행기가 착륙하는 순간에 또 한 번 게워내야 했다. 남들이 말하는 '촌스럽게 비행기 멀미를 하냐'의 주인공이 되었다.
- '델프트' 중에서 -
[ⓒ 사회가치 공유 언론-소셜밸류.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