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내면 웃음이 나오는, 잊고 있었지만 우리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이야기
[변하지 않는 건 있더라고] 저자 야루
김미진 기자
rlaalwls@naver.com | 2020-03-07 22:50:39
책 소개
<변하지 않는 건 있더라고>는 야루 작가의 에세이다.
꼭 겪어 보지는 않았어도 누군가 무언가를 말했을 때 모두가 무릎을 탁 치며 공감하는 그런 것이 있다. 머릿속에 물 흐르듯 장면이 그려지고 그러다 미소가 사르르 번지는 그런 것. 동네의 아주머니들은 모두가 뽀글이 파마를 하고 있고, 그런 아주머니들이 누군가 흉을 볼 때는 말투가 전국 어디나 다 똑같다. 누가 그렇게 하자고 합의를 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중학교 때 죽어라 외웠던 수학 공식은 다 잊어버려도 어릴 적 할머니 방에서 듣던 이야기들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의 분위기, 그때의 냄새, 그때의 공기까지도 모두가 하나같이 비슷한 마음으로 자리잡고 있다. 야루 작가의 에세이 <변하지 않는 건 있더라고>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꺼내면 웃음이 나오는, 잊고 있었지만 우리 마음에 한편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야기들 말이다.
멋진 문장도 아니고, 화려한 글귀도 아닌 그저 자연스러운 이야기. 작가는 많은 것들이 변하고 늘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은 있다고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한다.
야루 작가의 에세이 <변하지 않는 건 있더라고>는 독자들에게 소중한 무언가 잊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해준다.
저자 소개
저자: 야루
저는 오래된 것들을 보고 찾고 모으는 것들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타자기, 재봉틀, LP, 괘종시계 등 오래된 옛 물건들을 바라보면 느껴지는 귀여움과 가슴 따뜻했던 추억들이 마구마구 샘솟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보고 듣고 말할 때면 언제나 눈이 말똥말똥, 매일매일 항상 그런 것들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따듯한 미소와 포근한 마음을 느꼈던 잊고 있고 가까운 이야기들을 함께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2018년, '미지근한 이야기'라는 책을 내게 되었고 지금은 '변하지 않는 건 있더라고'를 말하게 되었습니다.
목차
한스밴드 - 오락실
닮긴 누굴 닮아 15 / 와다다다 17 / 우리 조카 손목시계 19 / 생활기록문 21 / 네 아빠는 어쩜 23 / 돼지는 꿀꿀 오리는 꽥꽥 25 / 맙소사 27 / 불치병 29
이문세 - 조조할인
비밀 얘기 33 / 그림일기 35 / 허재와 강동희 37 / 똑똑똑 누구십니까 40 / 천하무적 43 / 둥글게 둥글게 45 / 일요일은 내가 요리사 47 / 가만히 눈을 감고 49 / 지지배배 지지배배 51
김성재 - 말하자면
JOHN 55 / 누가 남자 아니랄까봐 57 /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59 / 아시아의 호랑이 61 / 공간과 공감 63 / 맴맴맴 65 / 환풍기 67 / 얇은 긴팔 69
양수경 -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기묘한 이야기 73 / 동띵동띵 75 / 공간의 완성 77 / 인품을 사려거든 80 / 펠레와 마라도나 84 / 남대문 과학자 88 / 어미새와 아기새 91 / 청개구리 93
솔리드 - 나만의 친구
자양강장제 97 / 빛이 나는 순간 99 / 부끄러운줄 알아야지 101 / 한일전 103 / 알고 있지만 나는 두려워 105 / 한번만 더 107 / 용두사미 109 / 괘종시계와 짜장면 111
박정운 - 오늘 같은 밤이면
사랑으로 115 / 좋아하는 일 117 / 내가 밥을 사지 뭐 119 / 쪼르르 옹기종기 121 / 121 / 기원합니다 123 / 되감기 125 / 누가, 언제, 어디서 127 / 거울 129 / 잘 알고 있으면서도 131 / 뜬 눈 133
봄여름가을겨울 -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초등학교 아니 그땐 국민학교 137 / 1995년 9월 22일 139 / 아차차차 141 /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143 / 종로 좌판 146 / 담배가게 아저씨 149 / 키높이 운동화 152 /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155 / 의정부행 159
보보 - 늦은후회
작고 예쁜 것들을 선물하는 것 163 / 이 질문은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165 / 그래서 그랬던 거야 167 / 미지근한 이야기 169 / 도봉산역 171 / 그깟 양말 한짝 173 / 잊는 게 어디 있겠어, 그냥 줄여가는 거지 175 / 만화경 177
박기영 - 마지막 사랑
추억 사랑만큼 181 / 맛없는 설렁탕 183 / 너무 늦은 말이 되었지만 185 / 스카비오사 187 / 슬픈 혼잣말 189 / 민들레 씨 191 / 안녕하세요 193 / 제목 미정 196
본문
내 방에 쌓여있는 오래된 물건들과 서랍 속에 빼곡히 가득 찬 어릴 적 추억들은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엄마는 그런 내 방을 보실 때마다 늘 혀를 차시곤 한다. 대체 쓸데도 없으면서 하나라도 버리면 지랄 지랄 한다고 잔소리까지 덧붙이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 쓸데가 있다며 능글맞게 엄마의 어깨를 조잘조잘 잘도 주무른다.
어제는 드라이 맡긴 겨울 코트를 꺼내려 안방에 들어갔다. 엄마의 장롱에는 내 방의 옷장과 달리 모든 게 가지런히 놓여있다. 뭘 건드리기가 무섭다. 얌전히 코트만 꺼내서 나가야지. 하다가 어울리지 않는 옛날 과자 박스 하나가 시선을 이끈다. 뜬금없이 이 안에 과자 박스가 뭐람. 얌전한 고양이는 결국 부뚜막을 헤집는다.
처음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의 명찰과 모자. 그리고 무당벌레 모양의 책가방, 학예회 때 입었던 서태지 티셔츠와 멜빵바지가 곱게 접혀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내가 거쳤던 교복과 한참 말 안 듣던 사춘기 시절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많이도 담겨져 있다.
다 지난 것들 좀 갖다 버리라면서요.
닮긴 누굴 닮아. 엄마 닮았지.
- '#닮긴 누굴 닮아' 중에서 -
휴일 아침에 한적한 마을 버스에 올라탔다. 작은 버스에는 의외로 뒷자리들이 꽉 들어차 있었고 나는 텅텅 빈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아뿔싸, 이어폰을 두고 왔다. 하는 수없이 그냥 적당히 딴생각이나 하면서 버텨 나가야지 하는데 갑자기 반대편 앞자리에서 뽀옹 하고 귀여운 방귀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나는 쪽을 향해 보니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친구가 얼굴이 새빨개져 있다. 운전사 아저씨도 백미러로 그쪽을 슬쩍 보시더니 아빠 같은 미소를 작게 지으신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버스 라디오를 크게 트신다. 나도 모른 척 괜히 헛기침을 하며 창밖을 바라본다. 하지만 학생은 멋쩍은지 하염없이 가방에 얼굴을 파묻는다. 학생의 붉은 귀가 파묻은 가방 사이로 잘도 익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 귀여운 광경을 목격한 사람은 나와 운전사 아저씨 둘뿐이었다.
이어폰을 가져왔으면 아주 큰일 날 뻔했다.
- '#비밀 얘기' 중에서 -
나는 어딜 가나 서슴없이 사람들에게 말을 잘 붙이고는 하는데 유독 시장에 오게 되면 그 접착력이 다른 장소보다 훨씬 강해진다. 그것은 역시나 한 분식집을 들어서자마자 한껏 나타난다. 나는 입장과 동시에 주인아주머니와 함께 '아들 새끼들은 키워봤자 다 소용이 없다'라는 주제로 강동희와 허재가 패스를 주고받듯 바로 시사 대담을 시작한다.
'아들 새끼는 역시 다 개새..'란 만장일치의 결론을 내린 후 나는 자리에 앉아 옆테이블 꼬마들과 역시 접착을 시도한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사회, 종교, 예술, 가십 어떤 이슈든 간에 말이 잘 통한다. 녀석들은 기분이 좋은지 내게 고등학생 아니냐, 잘생겼다, 키 173cm 같다. 라는 구구절절 옳은 진심을 남발한다. 그런데 대화에 참여하지 못한 한 녀석이 계속해서 나를 찌뿌둥하게 쳐다보다가 갑작스레 한마디를 건넨다.
"형아 여자친구 있어요?"
엊그제 새로 샀다는 코오롱 롱패딩에 떡볶이 국물을 묻히고 싶지만 참았다.
- '#허재와 강동희' 중에서 -
책상 위에 한쪽 발을 올린 채 발가락 사이에 펜을 꼈다 뺐다를 반복하고 있다. 두 눈은 초점을 잃었고 고개는 의자 뒤에 걸쳐서 빨래처럼 헤벌레 늘어져만 있다. 몇 시간째 나오지 않는 글 때문에 정신은 이미 저 멀리로 가있는 상태다.
- 똑똑똑
작업실 밖에서 누군가가 노크를 한다. 귀찮음에 반쯤 누워서 책상 너머로 문 앞을 보는데 아무도 없다. 그런데 금방 노크 소리가 또 한 번 울린다.
- 똑똑똑
누가 장난을 치나 엉거주춤 일어나서 문 앞을 보니 그제야 누군가가 서있는 게 보인다. 문 너머에는 작은 꼬마가 아주 작은 손에 무언가를 조심히 들고 서있다. 나는 발가락에 낀 펜을 빼고 머리를 잠시 다듬은 후 문 앞으로 걸어 갔다. 빨간색 땡땡이 원피스를 입은 꼬마가 수줍게 문 앞에 서있다. 그리고 그 작은 손에는 시루떡이 조심스레 들려있다.
"옆집에 왔어요 이사. 주래요 엄마가"
꼬마는 땅바닥 어딘가를 보면서 바들바들 그 떡을 내민다. 머리를 다듬길 잘했지. 쪼그려 앉아 꼬마가 건네는 떡을 받은 뒤 꼬마의 눈을 바라보며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꼬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고 나는 꼬마가 혹시나 넘어질까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집으로 들어갔는지 확인한 후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다.
요즘 세상에 이사 떡이라니. 건네 받은 그 떡이 꽤나 따듯하다. 널브러진 펜들을 서랍 속에 전부 집어넣고 조심히 내 작업 책상에 그 떡을 내려놓는다. 옷에 슥슥 대충 손을 닦으려다 화장실에 가서 깨끗이 손을 씻고 떡을 집어 든다. 따듯하다. 그 마음이 따듯한 건가. 나는 그 자리에서 남김없이 떡을 모두 해치운다. 그리고 바로 나와 동네 슈퍼에 들러 두루마리 휴지 가장 큰 놈과 막대 사탕 한 통을 산다.
오늘은 글이 참 잘 써진다.
- '#똑똑똑 누구십니까' 중에서 -
햇살이 예쁘게 비추고 범상치 않은 느낌에 문을 열었는데 수염이 덥수룩한 울그락 불그락 인상의 아저씨들이 담배를 태우며 식사를 기다리고 있다. 아저씨들은 하나같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우리를 흘려 보았고 다들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다. 음식은 세상 느긋하게 나오며 그 어떤 것을 느리게 가져다주어도 아무도 불만이 없다. 모두가 조용한 와중에 주인아주머니의 소녀 같은 콧노래만 흐른다.
갑자기 그 수염 아저씨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아저씨 하나가 다가온다. 주저하는 나를 향해 손가락으로 메뉴판 두 가지를 가르치며 흠흠 소리와 함께 따봉 모양을 치켜세운다. 뭐야 뜬금없는 이 다정함은. 무심히 돌아서는 뒷모습에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그랬더니 아저씨는 그 수염 속에서 다홍색 곰돌이 같은 표정을 꺼낸다.
내 생에 이렇게 이상하게 사랑스러운 곳은 이곳이 처음이다.
- '#기묘한 이야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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