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했던 만큼 사랑했던 방에 관한 개인의 기록

[삶이 고이는 방, 호수] 저자 함수린

허상범 기자

qjadl0150@naver.com | 2020-03-05 15:40:00

책 소개



<삶이 고이는 방, 호수>는 함수린 작가의 에세이다.


스무 살 이후 처음으로 찾은 자기만의 방, 고시원. 책은 작가가 보증금 한 푼 없이, 남들과는 출발선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며 서울의 한 고시원 514호에 입주하면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자취생활 내내 제 한 몸 뉘일 곳을 찾아 헤매던 작가는 호수(戶數)마다 들어찬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의 파장을 일으키며 살아가는 모습에서 물결치는 호수(浩水)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좁아서 싫다가도 유일하게 내 삶을 받아주었던 소중한 내 방. 취재 대상으로서의 고시원이 아니라 살아본 당사자의 목소리로 고시원 생활을 말하고 싶었다는 저자는 기민한 관찰력과 성찰을 통해 각 방에서 일어난 삶의 파문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함수린 작가의 에세이 <삶이 고이는 방, 호수>는 가진 것 없는 1인 가구의 씩씩한 고독과 새파란 번민, 읽을 때마다 독자의 삶과 겹쳐 매번 새롭게 읽히며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줄 것이다.




출처: 공상온도



저자 소개



저자: 함수린





목차



총 244페이지





본문



물이 괸 호수浩水에 작은 돌을 던지면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그리고 사람이 괴어 사는 각 방의 호수戶數에서도 삶의 파문을 만들어낸다. 이곳저곳 호수戶數 속에 괴어 산 지도 어느덧 십여 년. 나 역시 호수마다 파장이 다른 생활을 일궈갔고 생활은 삶에 여러 물결무늬를 남겼다. 또 한 번의 이사를 앞둔 지금, 길었던 한 시절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나의 자취 생활을 돌아보고 싶었다. 자취自吹 생활의 자취를 뒤적이며 건져낸 호수戶數 속의 호수浩水같은 사건들. 지금부터 쓰는 글들은 그간 내가 살아낸 호수戶數에 얽힌 이야기다.



거쳐온 방을 이야기로 엮을 생각은 2015년에 처음 했다. 생각을 글로 구체화하기까지 간헐적인 씀과 잦은 공백기가 있었다. 옛 생각을 하다가 문득 '오늘은 이 얘기를 해볼까' 싶으면 어딘가에 짧게 적어두는 식이었다. 거기다 기억을 덧붙이기도 하고, '이런 얘기까진 하지 말아야지' 싶은 건 지우기도 했다. 현생이 고달플 때는 몇 달이고 방치하기도 했다. 항상 일기인지 에세이인지 모를 기록들을 홀로 계속해왔지만, 왜 가장 먼저 호수戶數 얘기를 엮고 싶어한 것인지는 사실 나도 잘 몰랐다. 조금씩 쓰면서 그 이류를 알아갔다. 호수가 붙은 방에는 '나'라는 서사가 통으로 얽혀 있었고, 나의 서사는 곧 누구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는 내 서사의 발굴자였다.



스물두 살까지 자기 방을 가져본 적 없던 사람이 고시원에 살며 처음으로 자기만의 방을 가졌다. 한 번 집 밖에서 자기 방을 가져본 그는 다시 전처럼 본가에서 지낼 수가 없었고, 마침내 작은 원룸에서 독립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세 번째 고시원을 제집 삼아 서울에서 첫 직장을 다녔고, 언제쯤 고시원을 벗어날 수 있을지 초조해하며 기다렸다. 고시원을 떠나 친구와 함께 살기도 했고, 몇 년간 경기도민으로 살기도 했다. 다시 서울로 이사 온 지금은 주거 불안 없는 생활을 고민하며 살고 있다. '거주'를 테마로 요약한 13년의 서사는 대략 이렇다.



30대인 지금의 내 모습이 막연히 꿈꾸던 것과는 아주 다르듯, 매번 이사할 때마다 어떤 집을 찾아낼지 역시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예상 밖의 집을 거점으로 삼은 나는 삶에 익숙해지고 낯설어지기를 반복했다. 집을 옮길 때마다 매일 보는 풍경, 매일 다니는 동선의 기본값이 설계되었고, 집의 평수에 맞춰 품거나 버릴 물건을 결정해야 했다. 생활이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어쩌면 머무름을 뜻하는 '거주'는 꼬물대는 생활을 내포한 활동 명사일지도 모른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일하러 나갔다 돌아온 나를 반겨주는 곳. 집이라기보다는 방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작은 공간. 자취한 호수에서의 경험들로 나는 달라져갔고, 달라진 나는 내 삶에 변곡선을 삐뚤빼뚤 그려나갔다. 비록 어릴 때 꿈꾸던 어른의 모습과는 다를지 몰라도 나는 그 변곡선이 꽤 마음에 든다.



개인의 기록은 가장 작은 단위의 미시사다. 호수戶數 속에는 들여다보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얘기들이 있다. 나 자신의 과거를 서랍 속에 잘 개켜 넣고 싶어서 쓰기 시작했지만, 몇 년에 한 번씩 호수를 바꾸며 사는 사람들, 이웃 중 누구와도 왕래하지 않고 오직 자기만의 방에만 기거하는 사람들에게 와닿는 지점이 하나라도 있다면 감사할 것 같다. 이어질 첫 글은 처음 자기만의 방을 가지기 전의 기억, 최초의 집에 대한 이야기다.



- '프롤로그 -호수戶數를 시작하며' 중에서 -




ㅣ얼굴 모르는 옆방 사람도 서울 유학생이었음을



원룸텔에서 말을 섞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월세도 계좌번호로 보냈으니 난방이 되지 않는 이상 원룸텔 총무와도 말 섞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내 옆 방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인지는 알았다. 미술학원에 다니던 그녀는 실기 시험을 앞둔 고3 입시 준비생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몰랐지만 그녀의 신상은 벽을 타고 고스란히 넘어왔다. 벽은 너무 얇았고, 기척은 무척 가까웠다.



방 구조는 Ctrl + C, Ctrl + V 한 것처럼 똑같았다. 방문을 열면 마주 보이는 방향에 작은 창문, 그 아래 붙박이 책상과 의자, 오른쪽에는 침대가 있었다. 침대는 붙박이 책상 애래로 끄트머리가 들어갔다. 방의 세로 폭이 겨우 싱글 침대 길이만 했던 땅딸막한 방이었다. 방문을 기준으로 그녀의 방은 왼쪽, 내 방은 오른쪽이었다. 학원에서 실기 준비를 하고 돌아온 그녀가 침대에 앉아 통화를 시작하면, 자기 전까지 책상 앞에 앉아 소일하던 나는 그녀의 통화 내용을 생생히 듣게 되었다. 우리 사이에 놓인 벽만 치우면 바로 옆에 있는 거나 다름없었으니 방에 있는 동안에는 대화를 듣지 않을 자유가 없었다.



하루는 한 시간이 넘도록 통화를 하는 날이 있었는데 은사님과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실기 준비는 어떤지, 시험 날짜는 언제 언제인지, 학원에서 만난 애들은 어떤지, 처음 본 실기 시험은 어땠는지 등을 얘기했다. 웃긴 건 책상에서 밥을 먹던 내가 은연중에 그 대화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는 거다. 자신의 사적인 대화가 옆 방에 들린다는 걸 그녀가 알았다면 분명 소름 끼쳐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통화할 때 주의해달라거나 목소리를 줄여달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라 일상 대화도 방음하지 못하는 부실한 원룸텔 벽의 잘못이었으니까.



그녀가 긴 통화를 끝낼 무렵에 나는 그녀의 힘든 입시가 잘 마무리되기를, 원하는 대학에 꼭 합격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편 내가 방에서 통화할 일이 있을 땐 그 방을 면한 쪽은 피해 앉았다. 그러면서 내 방 침대가 놓인 벽 쪽으로는 다른 방이 붙어 있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방과 방 사이에 낀 호수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 양쪽으로 들려오는 기척을 어떻게 견디는 걸까 싶었다. 그리고, 그게 나는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 '방음 없는 원룸텔 사생활' 중에서 -




혼자 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사람은 저마다 마음에 구멍이 있다. 그 구멍에 바람이 드나들 때를 우리는 허하다고 말하는데 혼자 있을 때면 그 구멍이 유독 더 잘 보인다. 혼자라서 외로운 게 아니라 원래 있던 외로움이 혼자일 때 눈에 더 잘 띄는 것 같다. 지난 십여 년의 혼자살이 동안 고독과 외로움은 성가신 만성질환 같다가도 점차 데리고 살 만한 반려감정이 되어갔다.



아주 어릴 때부터 외로움과 고독을 머리로는 평생 함께할 감정이겠거니 생각하면서도 진짜 마음으로는 함께 하기 싫었다. 거부하고 싶었고, 진리처럼 보이는 그 사실이 실은 뒤집힐 수도 있는 것이었으면 했다. 삶의 분기점마다 포기와 타협을 거치면서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좋든 싫든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할 반려감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됐다. 여전히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고독과 외로움을 좋아할 순 없어도 싫어하면서 데리고 살고 싶진 않았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라는 측은함과 동지 의식으로 함께 살고 싶었다. 감정과 내가 서로를 죽이려 애쓰는 대신 함께 살아남고 싶었다.



무언가를 애써 미워하고 밀어내다 보면 되려 그것에 더 집중하게 되어 싫은 마음이 몸에 각인되고 만다. 돌아보면 가장 작고 초라한 방에 살던 경산 시절과 원룸텔 시절은 허무에 가장 집중했던 시기로 외로움이 만성이었다. 힘든 삶의 의미를 찾을수록 허했고 그 바닥 같은 감정을 징그럽게 앓았다. 이후 신촌 원룸텔을 벗어나 친구와 집다운 집에 처음 살게 되면서 '내 인생에 더 이상 고시원은 없다!'는 희망에 잠시 행복했었다. 하지만 얕은 희망이 휘발된 자리는 공허했다. 외로움을 새롭게 직면했던 때가 이때였다.



- '반려감정' 중에서 -




[ⓒ 사회가치 공유 언론-소셜밸류.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