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환상들, 내가 겪어야만 했던 영화들을 시로 써 내려가다.
[아주 멋진 잠수였다] 저자 이예현
오도현
dhehgus@naver.com | 2020-03-05 21:20:00
책 소개
<아주 멋진 잠수였다>는 이예현 작가의 시집이다.
다음은 책에 수록된 소개 글이다.
「실재하지 않는 나의 환상들, 내가 겪어야만 했던 영화들을 써 내려가며 나는 여태까지의 잠수를 정리했다.
이렇게라도 내가 죽은 후에 나의 흔적이 하나쯤은 남아있길 바라며.
이렇게라도 죽음이 두렵지 않길 바라며.」
이예현 작가의 시집 <아주 멋진 잠수였다>는 시뿐만 아니라 수록된 사진들로 하여금 독자들에게 더욱 깊은 작가만의 감성을 선사할 것이다.
저자 소개
저자: 이예현
목차
들어서며
1부.
유독 달이 밝은 밤 11 / 어젯밤 만난 고양이 14 / 저울 15 / 바닥이 없는 바다의 끝을 향해 16 / 아이야 17 / 캐러멜 상자 19 / 나의 것 21 / 영화 榮華 22 / 이명 23 / 천공 25 / 집으로 돌아가는 길 26 / 침묵의 시발점 27 / 검붉은 화향이 당신의 어깨를 스치다 29 /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에게 30 / 수심 찾기 31 / 그림자 놀이 37 / 마음의 크기 38 / 주황색 세상 40 / 아무도 향하지 않는 역 41 / 허기진 마음은 나를 43 / 화려한 밤 47 / 미안해, 미안해 48 / 불면 1 49 / 불면 2 51 / 나의 우주 안에 달이 떴다 55 / 우주를 간과하여 57 / 술주정 59 / 반갑지 않은 안녕 61 / 하품 62 / 새벽이 끝나는 곳 72 / 상처 73 / 색칠 74 / 무마의 결과론 75 / 쉽다는 것 76 / 비상의 가능성 77
2부.
무지개 85 / 해안 90 / 하나로 92 / 아이러니한 100 / 춤 101 / 소녀 103 / 포부의 선 105 / 수평선이 잘 보이지 않는 까닭 106 / 들풀 108 / 사랑하는 이들에게, 1 109 / 사랑하는 이들에게, 2 111 / 포말 113 / 조류 다이빙 116
본문
유독 달이 밝은 밤
유독 어두운 마을이 있었다
부정을 타 아무도 오지 않으려 하는 마을
그 마을엔 어린아이가 혼자 울고 있었다
눈물을 닦아주는 이가
울지 말라고 달래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유독 어두운 마을이 있었다
유독 달이 밝은 밤
아이는 스스로 울음을 그쳤다
- '유독 달이 밝은 밤' 중에서 -
어둠 속에 있는 작은 고양이처럼
미동도 없이
세상을
그렇게 빤히 쳐다보았다
미동도 없는 나를 가만히 두고
세상은 참 빨리도 움직였다
나 같은 건 기다려줄 시간도 없다는 듯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참 빨리도 움직였다
걸리적거리지도 않을 만큼 작고
볼품없는 나는
사람들에 치이지도 않고
눈에 띄지도 못했다
그 사실이 사무치게 무서워
난 그대로 사라지길 빌었다
그냥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사라지길 빌었다
- '어젯밤 만난 고양이' 중에서 -
저울이 부러진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너무 무거운 양의 무게를 담아내느라
자신의 저울이 부러졌다고 했다
한쪽에 너무 많은 양의 무게를 담고 살아
끝내 버티지 못해 부러졌다고 했다
다른 한쪽엔 무엇을 담았길래
저울이 견디지 못 했냐고 물으니
아무것도 담지 않았다고 했다
아무것도 담지 않았다고
- '저울' 중에서 -
스펀지처럼 주변을 빨아들였다
무거워질수록
나는 더 빨리 가라앉고
내가 어디까지 가라앉을지 모르겠어
나는 계속 주변을 빨아들이고
그렇게 점점 무거워지고
이 두 가지는 확실했으므로
스펀지처럼 주변을 빨아들이다
나의 용량이 초과되었을 때
나는 돌멩이가 되어
가라앉고 있었다
바닥이 없는 바다의 끝을 향해
- '바닥이 없는 바다의 끝을 향해' 중에서 -
여러 밤들이 있었다
너무 밝아 잠들지 못하는 밤에
나는 꺼놨던 핸드폰을 켰다
밝은 밤은 한층 더 밝아졌다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정답을 찾고있는 아이에게
빨간 크레파스를 쥐여주고 정답을 찾으라 했다
아이는 정답을 찾고 있다
어느 날
아이는 빨간 크레파스를 잃어버렸고
아이는 빨간 크레파스가 없어졌다며
울었다
어차피 정답은 찾을 수 없어
너도 알고 있지 않니
빨간 크레파스는 소용이 없다는 걸
아이야 너는 왜
울고 있니
아이는 왜
울고 있었을까
아이는 왜 울고 있을까
- '아이야' 중에서 -
정사각형도 직사각형도 아닌
캐러멜 상자 안에 갇혔다
끈적끈적한 달콤함이
내 발목을 잡아
나는 그대로 멈췄다
당장의 달콤함은
내 눈을 멀게 하기에 충분해
'앞으로 나갈 수가 없지'
나갈 수 없다는 절망보다는
당장의 달콤함이 행복했어요
끈적끈적한 달콤함이 내 허리를 감고
내 목까지 차올라
그제야 나는
숨을 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캐러멜 밖으로 나가려면
달콤함을 모조리 삼키던가 불을 내는 방법밖에 없어'
달콤함을 모조리 삼키기엔 내 몸이 너무 작아
피자 한 판을 다 먹을 수 있다는 5살짜리 아이의 투정처럼
나는 불을 지르는 방법을 택했다.
- '캐러멜 상자' 중에서 -
[ⓒ 사회가치 공유 언론-소셜밸류.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