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특별함을 알아채지 못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

[아무튼, 순정만화] 저자 이마루

허상범 기자

qjadl0150@naver.com | 2020-03-05 21:20:00

책 소개



<아무튼, 순정만화>는 이마루 작가의 에세이다.


'아무튼 시리즈' 스물일곱 번째는 순정만화에 대한 이야기다.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라는 아무튼 시리즈에 걸맞게, 사랑하는 연인과의 결정적 순간에조차 순정만화 속 대사가 자동으로 재생된다는 이마루 작가는 지금까지 이십 년 넘게 차곡차곡 쌓아오고 있는 순정만화에 대한 애정을 <아무튼, 순정만화>에 쏟아냈다.


이마루 작가의 에세이 <아무튼, 순정만화>는 '순정만화의 시대'를 통과한 이들이라면 작가가 소환하는 작가들, 작품들, 주인공들 이름만으로도 그때의 추억을 상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스토리지북앤필름



저자 소개



저자: 이마루



서재를 만화책으로 채우고 만화에 대한 책까지 낸 엄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만화를 보고, 그렸다. 부모님의 전근을 따라 소도시 곳곳을 옮겨 다니며 더더욱 만화에 빠졌고, 만화잡지, 도서 대여점의 흥망성쇠를 겪으며 자랐다.


어릴 때 받은 세례명이 '에디타'여서인지 잡지사 피쳐 에디터로 십 년 넘게 일하고 있다.





목차



내 인생의 대사는 순정만화로 채워져 있습니다 / 만화로 잡지를 배웠습니다 / 그 자체로 가장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 / 대여점과 함께, 만화가 사라졌다 / 사랑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 그래서 소녀들의 연애는? / 소녀들의 성 / 오, 우정이여 / 만화가 시키는 대로 입었습니다 / 내 유머가 순정만화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 그런 삶이 있는 줄 몰랐다 / 닫혀버린 세계





본문



학교 앞 네 평짜리 작은 원룸부터 지금 사는 오래된 1.5룸 아파트까지, 내 독립의 역사는 스무 살부터 실험과 팽창을 거듭해왔다. 그 역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물이 있다면 단연 책꽂이가 아닐까. 나무 밑둥의 나이테처럼 내게도 지나온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어떤 기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역시나 책꽂이일 것이다.


천안에 사는 엄마 아빠가 딸내미를 처음으로 서울로 보내며 장만해준 갈색 책꽂이, 그 책꽂이가 책으로 가득해질 즈음 하나씩 구입한 저렴한 공간박스, 공간박스가 너무 많아지자 비슷한 색으로 산다고 샀으나 먼저 쓰던 5단 책장과 묘하게 색이 달랐던 또 다른 4단 책꽂이, 이민 가는 선배가 저렴하게 양도한 선반형 책꽂이···.


멋대로 쌓인 퇴적층처럼 크기도 디자인도 제각각인 공간박스와 책꽂이를 모조리 처분하고서 몇 년 전 벽 높이와 너비에 딱 맞는 맞춤형 책장을 가졌을 때, 나는 비로소 진짜 독립한 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책꽂이의 흔적을 어떤 증거처럼 더듬는 건 엄마 아빠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해직 교사였던 엄마 아빠가 복직 후 이사한 아파트에 신경 써 들인 가구는 거실과 안방을 차지한 맞춤 책장이었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한적한 교외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하게 됐을 때 부모님이 가장 공들여 공사한 공간 역시 2층 서재였다.


끊임없이 책이 증식하는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알 거라고 믿는다. 아무렇게나 꽂힌 것 같은 책들 사이에도 주인은 알아볼 수 있는 규칙이 존재하며 혼란 속에서도 항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책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 집에서 만화책은 당당하게 책장을 차지한 존재였다.


엄마, 나, 동생 두루. 세 명이 느슨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모아온 만화책은 내가 10대 시절을 보낸 공간의 풍경을 정의한다. 만화책은 책등 디자인이 비교적 자유로운 데다가 여러 권짜리 시리즈로 나오기 마련이라 같은 권수라도 다른 책들보다 큰 존재감을 자랑한다.


나름의 진열 방식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작가별로 배치하되 좋아하는 작가의 만화는 책장의 '로열층'인 세네 번째 칸에 꽂을 것. 그러나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라면 시시때때로 꺼내 보기 좋게 오히려 책들과 칸막이 사이 빈 공간에 책등이 잘 보이도록 눕혀 꽂을 것. 책 대여점의 슬라이딩 도어 책장이 유용하다는 건 알았으나 막상 또 집에 들이기에는 수월하지 않았던바, 그다지 자주 보지 않게 된 만화책들은 이열횡대로 꽂힌 책들의 뒷줄로 밀린다. 만화책은 비교적 판형이 작고 가벼워 책꽂이 한 칸에 두 겹으로 쌓아 꽂기에도 적합하기 때문이다. 같은 작가의 조금 덜 좋아하는 작품을 뒷줄로 미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너의 위치는 내 마음속에서 이렇게 강등됐다!'라며 소소한 권력을 발휘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게 쌓인 2천 권 넘는 만화책 중에서 고르고 고른 수십 권만 챙겨 상경한 지도 어느 덧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 10년 넘는 시간 동안 '역시 없으니 안 될 것 같아서' 부모님 집에서 더 가져온 만화책 그리고 새로 사 모은 만화책을 합하면 3백 권쯤 되는 것 같다. 그리고 한국 나이로 서른넷이 된 지금 만화책들은 여전히 우리 집 책꽂이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각별하게 생각하는 책과 CD만 가져다놓은 침대방 책꽂이의 로열층 또한 만화책이 차지했다는 사실이 내 사랑을 증명하는 데 효력이 있을까?


수차례 예선과 본선 심사를 걸쳐 '아끼는' 책장의 '각별한' 자리를 차지한 작품들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내 남자친구 이야기』,『천사가 아니야』, 『우리들이 있었다』, 『해피 매니아』, 『헬무트』, 『그리고 또 그리고』···. 응? 그러고 보니 모두 순정만화 작가들의 만화뿐! 그렇다. 시대와 취향의 변화를 거쳐 지금까지도 내가 애지중지 껴안고 있는 만화들은 오로지 순정만화뿐이다.


살면서 맞닥뜨리는 다채로운 순간들, 그 순간순간에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들 또한 언제나 순정만화 속 대사였다. "미래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 신일숙)처럼 비장한 명대사일 필요도 없다.



"어느 시간에서든, 어느 공간에서든 반짝이는 것이 있다면 잘 간직해야지. 다듬지 않아도 그건 내겐 보석이니까."



고교 시절에 오가던 소란한 감정이 휘발되고 흐릿한 색채로 남는 과정을 장장 18권에 걸쳐 그린 만화 『다정다감』(박은아) 마지막 페이지에 새겨진 문장이다. '요즘 좀 괜찮잖아?' 싶을 때마다 나는 이 문장을 되새긴다. 일상이 비교적 평화롭고 만족스럽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드물고 소중한 순간들, 저녁을 먹고 야간 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전까지 짧은 시간 동안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교실 복도에서 나누던 수다, 그래도 서울에 올라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출퇴근길 차창 밖의 한강, 지금 기분에 딱 맞는 음악이 나오길 바라며 음악을 셔플모드로 재생해두고 집까지 걸어오는 길···. 일상이라고 여겼던 어떤 시간들이 아주 사소한 이유로 곧 비일상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로는 이 대사를 더 자주, 더 진지하게 떠올리게 되는 것 같다.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고서 사랑에 냉소적이라도 될라치면 『우리들이 있었다』(오바타 유키) 8권에 등장한 나나미와 야노의 키스신을 되새긴다. 야노는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먼 곳으로 전학을 가야 한다. 곧 떨어질 두 사람은 사랑을 지키자고 맹세하면서 별빛 아래에서 입을 맞춘다. 그리고 그 순간 여주인공 나나미의 독백이 밤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 '내 인생의 대사는 순정만화로 채워져 있습니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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