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빛나던 청춘의 시간을 잊고 살았다.

<조금 더 쓰면 울어버릴 것 같다. 내일 또 쓰지.> 저자 남하

오도현

kwonho37@daum.net | 2019-12-26 17:47:57



책 소개


[조금 더 쓰면 울어버릴 것 같다. 내일 또 쓰지.]는 남하 작가의 에세이다.


책은 1985年부터 1988年까지, 아빠가 연인이었던 엄마에게 쓴 편지들을 엮었다.


기획부터 제작까지 모든 과정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한 독립출판물이다.


다음은 책에 수록된 작가의 말이다.



「사람은 망각을 잘 한다.


그렇게 빛나던 청춘의 시간이 있었는데 잊고 살았다.


21살에 시작하던 편지가 생활인이 되면서 끊겼다. 그 사람과 결혼해서 편지의 기능이 반감되었을 수도.


치기와 순수, 그리고 가슴 뛰는 동경, 미래, 불안감, 사랑의 기대.


젊은 날의 기억을 잘 갈무리해준 소중한 가족과 그대에게 감사의 편지를 드린다.」


남하 작가의 에세이 [조금 더 쓰면 울어버릴 것 같다. 내일 또 쓰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부모들에게 풋풋하고도 행복했던 청춘의 시간을 상기시켜줄 것이다.


[출처: 스토리지북앤필름]

저자 소개


저자: 남하


8년의 연애 끝에 27년의 결혼 생활을 유지 중. 지금은 평범한 가장이다.


목차


1985年_조금 더 쓰면 울어버릴 것 같다. 내일 또 쓰지.


1986年_선잠에서 깨어나 꿈으로만 끝나버린 우리들의 만남이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봄비가 하루내 쉬임없이 내리고 있다.


1987年_네 생각을 하면 못난 자신이 한없이 더 미워진다. 뭐가 보고 싶다고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1988年_불빛이 너무 어두워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엉망이 될 것 같다.


본문


1986年 4月 11日


끊임없는 만남과 이별의 순간순간으로 살아가는 우리네 삶 속에서 우리들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와 어떤 모습으로 이별을 맞이할는지.


서로에게 좋은 모습으로 다가와 기쁨을 지니고 만났으매 만남 자체는 아쉬움이 있을 수 없으나 훗날에 어떤 이유로서 이별을 갖게 된다면 얼마나 상심한 시간들이 될는지 생각하기조차 싫은 모습이다.


글쎄 하필이면 서두부터 이런 말로 시작했을까.


지금도 널 생각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글쎄 혼자서 텅 빈 공간을 지키고 있자니 잠시 헛 생각을 한 모양이야.


네 말마따나 봄이 오고 있다. 아직 초록으로 물들려면 멀었지만 군데군데 한초롬히 꽃임을 머금은 게 여간 신기하지가 않다.


바람이 불어도 예전처럼 차가운 한기를 동반하지 않고 제법 미지근한 훈기를 지니고 있다. 온통 들이 초록으로 물들 즘이면 널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6월 달 쯤에.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기 짝이 없지만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감이 있어 결코 지루한 시간만은 아니다. 오히려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윤기 있게 흐른다고나 할까. 가까이서 서로를 생각하고 위해주는 것도 좋지만 멀리서 홀로 그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몹시도 보고 싶을 때라도 마음대로 볼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완전히 성숙하게 무르익었을 때 만남을 가진다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하루하루 시간은 지나가지만 항상 제자리걸음만 치고 있는 것 같다.


글쎄 빨리 시간이 흘러 지나가야지만 순간이라도 빨리 만날 수 있을텐데, 봄이 오는 모퉁이에 서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좋은 사람의 그림자라도 보이지 않나 하고 애타던 시간도 있지만 글쎄 다음에 만나게 되면 자연스레 해결된 문제요. 이곳에 와서 생활하는 것도 젊은 날의 한 순간에 불과할 것임에 좀 더 성숙한 삶을 위해 지금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버리자.


마음 아픈 일이 있거들랑 순간을 눈 감고 참아 버리고 부당한 일일랑 끝까지 붙들고 시원하게 해결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


요즘 생활하기 어떻냐고 물어보지 않을래.


글쎄 오래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온 사람이 시간이 지나 이것들과도 친해지고 새로운 고장에 낯이 익어 친숙해졌다고나 할까.


이제 어느 정도 내 자리로 확보했고 잠시 자신을 정리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느 틈엔가 날이 밝아버렸다.


잠시 후면 기상시간이 될 것 같다.


시끄러워지기 전에 편지를 맺자.


또 쓰기로 하면서.



ps. 보고 싶은 희에게 남하 새벽녘.


- '요즘 생활하기 어떻냐고 물어보지 않을래.' 중에서 -


1988年 3月 7日


제법 봄기운이 따사로운데 지금 내 사랑은 무얼 하고 계시는지, 새봄과 함께 시작될 귀여운 애들은 만나 보셨는지.


그냥 물러서기가 아쉬운지 겨울의 그림자가 가끔씩 꼬리를 다시 내밀지만 충분히 견딜만한 날씨예요.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충동과 상심으로 하루해를 보내지만 그래도 봄기운이 돌기 시작하니 하루의 상심은 저 멀리로 사라지고 화사하게 웃는 그대 모습만. 남쪽에서부터 꽃이 핀다는데 꽃 피거든 제일 먼저 내게 알려주고 사랑하노라고 편지 한 장 띄우세요 강원도로. 얼마 있지 않으면 만날 사람이지만 동안의 생활이 하 단절을 많이 겪었던 시간들이기에 그에 대한 보상의 기간들이 얼마만큼 소요될지는 잘 모르겠으나 영원한 사랑의 힘으로 다시 한 번 살아봅시다. 한풀 한풀 꺾여 가는 차가움의 계절.


멀리서 가까이로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만 한 봄의 계절.


모든 게 변하고 소멸하고 살아나곤 하지만 한 개 변하지 않아도 좋을 게 있으니 사랑이 아닌가 싶소. 가끔가끔 불안의 장막이 어두움을 만들지만 사랑의 초 한 자루만 밝게 불 밝혀 둔다면 이 또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어요. 여태껏 더 많은 시간들도 기다렸는데 이제 두어 달. 웃으면서 보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구태여 어떤 의미라는 토를 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맞이하고 보내려 합시다 (시간을).


사랑하는 맘보다 더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 88페이지 중에서 -


1988年 3月 12日


봄, 비, 밤, 시심, 종일 비가 내렸다.


호우라고 하던가. 소리 없이 안개처럼 내리는 비를 바라본다.


완연한 봄날로 별로 비와 친숙치 못한 나이지만 오늘만큼은 왠지 싫지가 않다. 마음의 여유가 그만큼 더 생겼기 때문일까. 당당히 바라볼 수 있는 아련한 그리움 한 자락과 함께 받은 반가운 글의 엽서 두 장.


오늘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랑할만한 날이다. 참, 비가 꿈에 내려 조금 비를 맞아 보았어. 별로 싫지가 않아. 이 비를 말미암아 설악산의 눈도 서서히 녹을 것만 같아. 언제까지나 겨울일 수만은 없잖아. 계절도 마음도 모두 활짝 갠 맑은 날 뭔가를 위해서 조금은 아쉬운 감정을 남긴 채 새론 형태의 또 무언가를 발견해야만 한다. 우리들의 시간까지도, 어제에 이어 다시 편지를 쓰자. 겨우내 끼고 있던 장갑을 오늘 처음으로 벗었다. 약 3분가량 시내버스를 탔는데 나만 장갑을 끼고 있어, 문득 손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어. 화창하게 갠 날씨만큼이나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참 활기 넘쳐 보이더라. 봄바람 타고 날아드는 이해하기 힘든 마음. 아니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설렘 같은 게 몹쓰게시리 마음을 흘리는 것도 같아. 조금만 더 참으면 보고 싶은 사람들 맘대로 볼 수 있겠지. 이별 없는 나날들 속에 잠시 떨어져 지내는 한이 있더라도. 2년 하고도 6개월이란 숫자를 새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많이 많이 생각하면서 사진 한 번 보고 나서 잠을 자야겠다.


- 89페이지 중에서 -












[ⓒ 사회가치 공유 언론-소셜밸류.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