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착역 없는 상념들을 담은 작은 책
<상념의 계절> 저자 주현우
오도현
kwonho37@daum.net | 2019-12-16 22:55:48
책 소개
[상념의 계절]은 주현우 작가의 에세이다.
작가는 지나간 일 년 동안 써놓은 글을 모아서 다듬었다. 사소하고 개인적인 일들이지만 자신의 우주의 일부분이 된 어느 한 해를 세상에 남기려 한 결과물이다. 교환학생을 떠난 저 먼 세상에서의 걸음부터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 휘청거렸던 계절들이다. 비틀거렸던 시간들까지 눌러 담아 짧은 생각들이 되었다.
작가는 말한다.
'종착역 없는 이 상념들을 담은 작은 책이 어느 날엔가 위로로 다시 돌아오길 희망합니다. 이 짤막한 이야기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이야기가 결국 당신의 이야기를 듣게 만드는 하나의 섬광이 되길 바랍니다.'
저자 소개
저자: 주현우
무엇으로 살아갈지 몰라 많이 헤매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만 생각했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헤쳐 나가며 살아보려 합니다.
목차
1부
Bon voyage 9 / Coffeeshop 14 / 편집 16 / 요행 18 / 세비야의 어느 새벽 20 / 내일 23 / 메디나 이야기 24 / 사하라의 보름 32 / 그녀의 달 34 / 싫은 것 36 / 결승 38 / 노을 40 / 친구야 41 / 마찰음 43 /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44 / 착각 48 / 주정뱅이들아 50 / 중성 부력 52 / 안녕, 서울 56 / 당산의 물음 59
2부
포항역 65 / PIN 67 / 가라앉다 69 / 만월 71 / 시시콜콜한 이야기 - 이소라 72 / 편지 74 / 첫눈 76 / 집 78 / 고드름 81 / 12.31 83 / 부치지 못할 편지 86
본문
6개월의 타향살이가 어땠냐는 물음에 대한 나의 답을 들려주면 돌아오는 반응은 하나같이도 '왜요?' 였다. 나의 대답이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만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자주 고개를 쳐들었다. 그들의 기대에 따르면 나의 타향살이는 늘 북적거리고 명랑했으며 맥주나 와인이 가득하고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만큼이나 웃음소리가 가득한, 그런 생활이어야 했다. 그들이 봐왔던, 함께 웃으며 넘치도록 술잔을 채우고 적막함을 적으로 간주해 시끄러운 말소리로 무장하던 우리 혹은 나는 그런 사람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기대라는 것은 다소 빈번하게 실망이나 좌절 따위의 친구를 데리고 온다.
네덜란드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 이미 많은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 일종의 전야제였던 소란한 그날 밤이 지나고 남은 것은 흩어져버린 친구들, K의 방에 홀로 남은 나 그리고 사라진 휴대전화였다. K의 방을 나와 성북천을 따라 캐리어를 끌었다. 캐스터가 보도블록 사이사이에 부딪히며 내는 소음들이 아침의 적막함에 생채기를 냈다. 그리고 닿아야만 했던 나의 연락의 부재로 인해 누군가의 마음에도 깊게 팬 상처를 남겼다.
10시간 남짓한 비행시간 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감정이 사선으로 곡선으로 직선으로 머릿속을 헤집었다. 이 비행이 끝나지 않길 바랐다. 맛을 떠올리기 싫은 기내식이라던가 화면이 어지러운 영화 따위는 상관없었다. 시간이 되면 다시 벨트를 차야 할 것이고 고도가 낮아질 것이다. 불빛들이 흩뿌려져 있는 어느 도시의 야경을 지나쳐 곧게 뻗은 활주로 위로 바퀴를 내밀 것이고 땅에 닿는 충격과 동시에 속도는 줄어들 것이다. 이내 게이트 앞에 도착해서 발을 내밀게 되는 그 순간부터는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나에게 온 여러 걱정과 안부에 대한 답을 해야 했고 그럴싸한 핑계들을 내밀어야 했다. 소란스러운 이 사태에 대한 면죄부를 어디선가 만들어와야 했다.
주인 없는 셰퍼드 한 마리가 제집 앞마당에서 뛰놀 듯 공항 라운지를 누볐다. 음침한 분위기와 불안해 보이는 사람들. 영어보다 날카롭고 투박하게 귀에 꽂히는 목소리들. 이런 것들이 모스크바 공항의 첫인상이었다. 허기나 피곤함은 미뤄두고 할 일을 해야만 했다. 백팩에서 노트북을 꺼내서 벤치에 앉았다. 2시간이 채 안 될 배터리 상태를 알고 있었기에 노트북이 켜짐과 동시에 절전 버튼을 누르고 와이파이를 찾아야 했다. 그 먼 북녘의 땅에서도 나를 이끌어줄 빛줄기를 찾기 위해서. 그리고 찾은 공항 와이파이는 참으로 악랄하게도, 나에게 휴대전화 인증을 요구했다. 짜증 낼 겨를도 없었다. 옆에 앉아있던 30대 초반의 중동인은 다행스럽게도 영어를 조금이나마 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간신히 그의 데이터를 빌렸다.
- 'Bon boyage' 중에서 -
4년 전에, 그러니까 꿈의 불씨가 꺼지기 전에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계기가 된 유럽 여행에서 나는 담배 냄새와 그 냄새를 구별하지 못했다. 암스테르담의 무수히 많은 가게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그저 카메라 렌즈에만 담았을 뿐이다. 그때의 나는 길거리의 냄새들이 그 냄새인지는 짐작조차 못 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나 그 땅에 짐을 풀고 난 후에야, 대륙 어디를 가도 그 연기가 타오름을 알았다. 담배보다 뭉툭하고 좀 더 원초적인 향. 폐 속으로 스멀스멀 침전해오는 그 향.
어린 날의 내가 몰랐던 것은 그 향이 낮은 땅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온 유럽대륙의 골목마다 무거운 냄새들이 피어났다. 그리고 아직도 돌돌말려있는 그 연초의 끝은 어두운 골목에서 번뜩일 것이다.
- 'Coffeeshop' 중에서 -
발걸음 사이의 간격이 생길 때마다, 너는 무심결에 사진들을 정리한다. 지나간 장면들을 때로는 시간대로, 때로는 공간대로 찾아 비슷한 사진과 흐릿한 사진들을 찾아낸다. 너의 선택에는 의외로 망설임이 없다.
너는 추억을 솎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가 겪은 무수히 많은 찰나를 되짚어가며 장면 장면들을 편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돌이키기 싫은 순간을 지우고 비슷한 찰나에서도 선명한 시간을 남겨둔다. 순간의 연속인 너의 인생들을 조금이나마 다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에 사라진 것과 있어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여도 남아 있는 것은 너의 생애, 그 단편이다.
그 단편은 화려한 영화가 될 수도 있고 조잡한 퀼트로 남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벽에 걸릴 만한 모자이크가 될지도. 종래 쌓아온 당신의 층위들은 하나의 사실 그리고 역사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것은 너의 단편으로 남아 함께할 것이다.
- '편집'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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