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곁의 투명인간
투명인간 x 아이다호
Jess
kwonho37@daum.net | 2020-04-05 22:38:15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그 존재감이 미미한 이를 일컫어 흔히들 ‘투명인간’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게 아니라면 공상과학 소설 혹은 영화에 등장하는, 실제로 육안에 보이지 않는 몸을 지닌 초능력자들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성석제 소설가의 장편소설 [투명인간]은 SF와는 거리가 먼, 고된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낸 작품이지만 놀랍게도 후자의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들이 등장해 첫 페이지부터 독자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끈다. ?
투명한 몸을 숨기기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라이딩 복장으로 무장한 채 여느 때처럼 자전거를 끌고 한강대교에 오른 투명인간은 자살방지 캠페인 시설물 앞을 서성이는 무기력한 한 남자를 보게 된다. 그는 곧 남자가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때부터 소설은 훌쩍, 몇십 년 과거로 돌아가 다리 위 남자의 정체인 만수, 그의 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시대부터 거꾸로 훑어 내려오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3남 3녀 6남매 중 넷째인 만수와 그를 둘러싼 가족 구성원들의 기나길고 처절한 연대기인 동시에, 페이지마다 한국의 ‘한’을 담아낸 마음 저린 한국 현대사의 보고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만수 가족이 살아가는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집안이자 마을의 자랑, 동생들에게 존경이자 선망의 대상이던 맏형은 서울의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만 돈을 벌기 위해 월남에 갔다 병에 걸려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하고, 똑똑하고 야무지기 짝이 없던 작은 누나는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세상 천지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 버린다. 남자 형제들 뒷바라지하느라 자신의 꿈 한번 펼치지 못한 착한 큰 누나는, 한 남자와 깊은 사랑에 빠지지만 못난 아버지의 자격지심 때문에 그를 떠나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별 볼일 없는 이를 남편으로 맞이한다. 남매들 중 가장 뒤떨어지고 어딘가 모자라 보였던 만수는, 그래서일까 도리어 모두를 보듬을 수 있는 따뜻한 어른으로 성장해 가족의 중심을 지킨다. 종적을 감춘 남동생의 사생아를 친아들처럼 키우지만 아무리 우직하게 살아도 삶은 갈수록 고되기만 하다. 그러다 가족 중 가장 먼저 투명인간이 된 것은 아이였다. 그리고 마치 전염이라도 되듯 만수의 아내도 만수도, 문득문득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사회 속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 되어 버린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1991년작 [아이다호]는 아름다운 외모로 주목받았던 리버 피닉스의 대표적인 유작이자, 젊은 시절 빛나는 미모의 키아누 리브스를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 속 마이크와 스콧으로 분한 둘은 지저분한 길거리를 전전하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몸을 판다. 밑바닥에서 쌓아진 우정이지만, 고아나 마찬가지인 마이크와 달리 스콧은 부유한 시장의 아들로 언제든지 돌아갈 든든한 집이 있다. 마이크에게 고된 삶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지만, 스콧에게 거친 길거리는 치기 어린 반항이자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엄마를 찾아 나선 마이크의 동지가 된 스콧은 타지에서 만난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마이크에게 엄마를 같이 찾아 주겠다고 했던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 된다. 사랑을 통해 성숙해진 스콧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방탕했던 길거리 생활을 청산하고 새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마이크는 이전보다 더욱 외로워졌을 뿐, 아무런 변화 없이 자신의 자리, 사회 속 보이지 않는 피라미드 가장 밑바닥을 묵묵히 부유한다.
마이크는 머리에 특정 자극이 오면 갑작스러운 발작과 함께 수면에 빠지는 ‘기면발작증’을 앓고 있다. 때문에 영화 속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여러 번 쓰러진다. 어느 여인의 침대 위에서도, 호텔 방에서도, 도로 한가운데에서도, 일상적인 삶에 너무나 이질적인 파장을 일으키며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존재감을 지워낸다. 그는 이미 모두에게 잊힌 사람이자,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이다. 마이크가 쓰러지기 전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대부분 고향인 ‘아이다호’에서 엄마와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다. 어쩌면 그 찬란한 무지갯빛 추억들은, 이미 투명해져 버린 그의 뇌가 감당하기에 너무 큰 자극이었나 보다.
두 작품이 보여주는 현실은 쓰다. 짜릿한 반전이나 훈훈한 결말은 없다. 흔해 빠진 권선징악도, 하다못해 그들의 하찮은 삶이 아주 의미 없는 것만은 아닐지 모르겠다는 일말의 여지조차도 던져주지 않는다. 그저 현실 세계의 허리 한 움큼을 베어내 아무런 가감 없이 보여줄 뿐. 하지만 적어도 이토록 흔하게 현실세계에 혼재해 있는 투명인간을 인식하는 순간, 더 이상 그들은 투명하지 않을 것이다. 그 투명함은 곧 우리의 자화상을 비추는 거울이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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