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메이트를 만난 적이 있나요?
소울메이트를 만난 적이 있나요? 어.. 그런 거 같긴 한데요.....
Jess
kwonho37@daum.net | 2020-07-21 13:58:00
소울메이트를 만난 적이 있나요?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대답하기까지 한참을 망설일 것 같다. 음.. 만난 적이 있긴 한데요.. 취향도 취미도 대화도 너무너무 잘 통해서, 마치 서로가 서로의 이성 버전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나랑 꼭 닮은 그런 사람을 분명 만나기는 한 적이 있거든요... 근데 뭐가 문제냐고요?
그 사람을 만난 건 제법 점잖은 어떤 모임에서였다. 이름도 눈빛도 말투도 선한 그 사람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다행히 그 사람도 나에게 그랬던 것 같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락처를 교환했고, 모임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 첫 연락이 왔다. ".. 혹시 괜찮으시면, 다음번에 저녁 식사를 같이 할 수 있을까요..?" 바른 연애의 정석같이 예의 바르고 깍듯한 그 사람의 태도가, 대화법이 참 좋았다. 첫 만남에서부터 우리는 할 말이 끊이질 않았다.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맥주 한 잔이 두 잔이 되는 내내 둘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헉, 정말요? 저돈데!" 였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 나와 취향이 같은 사람, 내가 말하는 포인트를 귀신같이 이해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남자 여자를 통틀어서 그랬다. 내 가족보다, 친한 친구보다, 과거 사랑했던 그 어떤 남자보다도 나와 쏙 빼닮은 사람이었다.
첫 데이트가 끝나고 신나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있잖아, 드디어 소울메이트를 만난 것 같아. 완전 내 남자 버전이라니까? 그 사람 입으로 그렇게 말했어! 내가 자기의 여자 버전인 것 같아서 소름 끼칠 정도라고-. 실제로 오랜 시간 내 이상형은 '나의 남자 버전'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소울메이트를 찾아냈으니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데이트가 이어졌고 그는 역시나 연애의 교과서처럼 네 번째 만남 즈음에 나에게 교제를 제의했던 것 같다. 놀랍게도 그때 나는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여전히 그 사람과의 대화는 즐거웠고, 이토록 깊이 있고 지적인 남자를 만난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니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한 치의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오직 한 가지 문제는, 이성적인 끌림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아주 조금도!
"아, 원래 내가 좀 천천히 마음을 여는 편이라.." "낯을 좀 가려서..."와 같은 말로 에둘러 말했지만 그는 의외로 직진하는 스타일이었다. "만나면서 알아가면 되지~!" 거기서 칼같이 거절하는 게 맞았을까. 하지만 내 소울메이트인걸? 내 머리는 분명 이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은데, 마음- 아니 몸은 왜 조금도 따라주지를 않냐고. 사귄 첫날 그는 내 손을 덥석 잡고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이상하게 나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어색하고 싫었다. 사실 나는 절대로 천천히 마음을 여는 스타일도, 낯을 가리는 성격도 아니다. 사랑에 있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코뿔소처럼 달려드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전 경험해 본 적 없는, 요상한 연애가 시작이 되긴 되었다.
그런데 사귄 첫날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늦은 시간인지라 버스가 끊겨 택시를 잡아 주긴 주었는데, 나를 태우고 문을 닫으며 "택시 번호 기억할게~!"라고 말했던 것이다. 사실 나는 매너 좋은 그가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할까 봐 혼자 가도 괜찮다며 거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와 있는 게 숨 막혀 빨리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다행이긴 한데, 왠지 여러 가지로 기분이 찜찜했다. "하아-"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을 내쉬는 순간, 택시 기사님의 방언이 쏟아져 나왔다. "아니, 저 놈이 남친이야?" 로 시작된 말은 이 시간에 여자 친구를 혼자 보내는 놈이 어딨냐-, 택시번호 기억하면 개뿔 뭐 어쩔 거냐 무슨 소용이 있냐-, 택시기사만 몇십 년 짼데 딱 보면 사이즈 나온다, 저런 놈은 만나주면 안 된다-, 택시비 3만 원 넘게 나와도 데려다 줄 놈은 다 데려다준다, 안 되면 적어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면서 택시비라도 쥐어주지 저게 뭐냐, 마음 있으면 저렇게 안 한다 아가씨 무시하는 거다, 사귄 첫날인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심지어 왜 약속을 지랑 가까운 동네로 잡냐 자기 좋은 데 산다고 아가씨 얕잡아보는 거 아니냐- 까지 무궁무진하게 이어졌다. 기사님도 나만한 딸이 있다고 했다. 첫날부터 남의 입을 통해 남친 욕을 한 바가지 듣는 경험이란 꽤 흥미진진했다. 그는 물론 기사님이 말한 것보다야 훨씬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것도, 나를 쉽게 봐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적어도 남의 눈에 그렇게 보이도록, 날 졸지에 그렇게 안쓰럽고 처량한 신세로 만든 게 기분이 좋진 않았다. 택시에서 내려 그와의 통화에서 장난스럽게 "오빠 택시 기사님한테 욕 엄청 먹은 거 알아요?" 말을 꺼내자 그는 그렇게 답했다. "아-, 어쩐지. 내가 번호 기억한다고 해서 기사님이 불쾌해하셨지?"
나쁘진 않은데 센스와 눈치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알면 알수록 그랬다. 취향과 취미는 같았지만 성격은 완전히 달랐다. 나는 외향적이고, 그 사람은 내향적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망나니고 그 사람은 선비였다. 둘 다 자신과 비슷한 성격만 만나다 다른 스타일의 연인을 처음 만나는 거였다. 그래서 긴장되지만 동시에 설레고 신난다고 그는 그렇게 예쁘게 말했다. 반면 하루하루 나는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니 일단 남자 친구랑 손 닿는 것도 싫은데, 연애를 어떻게 해? 그런데 또 내가 아는 철학자, 작가들을 그가 다 알고 있고- 아니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고 예술 영화에 대해 깊이 얘기를 나누고 내가 읽는 책에 관심을 가져주고, 그러니 섣불리 싫어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너무 착하고 바른 사람이었단 말이다. 아 이런 사람이 진짜 좋은 남편감인데, 이런 사람이랑 결혼을 해야 하는데 대체 왜 끌리지가 않니.... 소울메이트를 눈 앞에 두고도 마음을 주지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내 인생에 손꼽힐 만큼 기묘한 순간이 찾아왔다. 여느 때와 같은 고상한 데이트였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일생을 다룬 예술 영화를 보고,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소울메이트'로 넘어왔는데 그가 이렇게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가는 모임에 친한 형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 파울료 코엘료의 '브리다'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게 마녀들의 이야기거든. 그 책에서는 소울메이트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한대." 거기서 진작 멈췄어야 하는데, 나는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문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이마에 표식이 있어서 소울메이트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데, 세상에 단 한 명만 있는 게 아니래." 불길한 예감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하지만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전생, 혹은 그 전 생에서 함께 영혼을 이루고 있던 일부가 환생을 거듭하며 세상 곳곳으로 흝어지게 되는데, 같은 몸과 영혼을 구성하고 있던 조각들이 서로를 다음 생애에서도 알아본다는 거지. 그게 소울메이트래. 그럴듯하지 않아..?" 그럴듯하다. 하지만 나는 어색하게 굳은 얼굴로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주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내 뇌리에, 가슴 깊이 박힐 만큼. 내가 소울메이트를 기다리게 된 이유일지도 모를 만큼. 아니 그러니까 그건 불과 며칠 전, 내가 그에게 직접 해 준 이야기였다.
그가 어찌나 실감 나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내 입에서 나온 말을 나에게 그대로 들려주었는지 나는 황당하다 못해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뭐야, 고작 2-3일 전에 내가 말한 걸 기억을 못 한다고? 기억 상실증인가? 어디 뇌에 이상이 있나? 아니면, 쌍둥인가? 로봇인가? 뭔가 오류를 일으켰나..? 대체 뭐지? 어떻게 그게 내가 한 얘기라는 걸 인식 못하고 저렇게 뻔뻔하고 자연스럽게, 남이 해 준 얘기라고 말할 수 있지..? 어떻게 지금 내 얼빠진 표정과 밋밋한 반응을 보고도 뭔가 잘못된 걸 눈치를 못 채지? 혹시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건가? 내가 처음 '브리다'를 들었을 때부터 바로 얘기했어야 하는데, 지금 말하긴 너무 늦었겠지...?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아주 생소한 당혹감이었는데, 당연히도 그 사건은 그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진 않았다.
이별을 고하려 결심한 날, 비가 내렸고 그는 약속 장소에 늦게 나타났다. 최대한 빨리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열심히 찾아봤다며 마사지 카페를 데려가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색하게 나란히 안마의자에 앉아 약 한 시간 동안 말없이 안마를 받고, 몸에 좋은 건강차를 마시고, 또 카페로 갔다. 내가 커피를 샀다. 참 해맑고 못해 청초하기까지 한 그를 보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만 가득했다. 아 이렇게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내가 실수하는 걸까 싶었지만 손은 여전히 잡고 싶지가 않았다. 마음을 굳게 먹고 "오빤 정말 좋은 사람이지만..."을 시전 했다. 그의 반응은 역시나 고고한 선비 같았다. 놀라고 서운한 기색이었지만 내 의사를 존중해 주었고 훈훈한 덕담까지 잊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지게끔 배려해주는 그야말로 진정 좋은 사람, 멋진 사람이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기에 결국 물어봤다. 브리다 얘기는 내가 한 거라고, 기억 안 나냐고. 재밌게도 그는 토끼 눈을 뜨며 부정했다. 아니라고, 자기가 분명 똑똑히 기억한다고. 그 모임에 그 형이 분명, 몇 명이 모였을 때, 어떤 상황에서 말한 거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까지 했다. 내가 우리가 만났던 날짜와 상황, 앞뒤에 이어졌던 이야기까지 줄줄이 읊어주자 그때야 헐... 정말? 하며 정신이 드는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결론적으로는 일부러 그랬던 것도, 회선 오류를 일으킨 인공지능도 아니었고 그저 인간 뇌가 가진 한계였던 모양이다.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쉽게 왜곡될 수 있는지, 사실이 아닌 것조차 굳게 믿게끔 하는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결국 소울메이트인 줄 알았던 그와는 아이러니하게도 '소울메이트' 때문에 영영 멀어지게 된 것이다.
모르겠다. 그가 정말 어느 생애쯤 나와 같은 영혼을 구성하고 있었던 걸까. 세상 곳곳에 흩뿌려진 내 수많은 소울메이트 중 하나였을까. 감사하게도 나는 내 인생에 그를 겪은 이후부터 소울메이트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세상에 나와 완벽히 같은 존재는 없다는 것, 어떤 사람에게든 허술한 빈틈은 존재한다는 것, 도리어 '소울메이트'라는 허상의 틀에 갇혀 상대의 진정한 본질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소울메이트를 믿는다. 하지만 그건 꼭 내 또래 이성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구멍가게의 할머니일 수도, 새로 사귄 절친일 수도, 내 곁의 반려동물일 수도 있다. 그러니 꼭 소울메이트와 연애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단순하게 살겠다. 그냥 내 머리가, 마음이, 몸이 한 박자로 끌리는 그런 사람과 사랑에 빠질 것이다.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대답하기까지 한참을 망설일 것 같다. 음.. 만난 적이 있긴 한데요.. 취향도 취미도 대화도 너무너무 잘 통해서, 마치 서로가 서로의 이성 버전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나랑 꼭 닮은 그런 사람을 분명 만나기는 한 적이 있거든요... 근데 뭐가 문제냐고요?
그 사람을 만난 건 제법 점잖은 어떤 모임에서였다. 이름도 눈빛도 말투도 선한 그 사람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다행히 그 사람도 나에게 그랬던 것 같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락처를 교환했고, 모임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 첫 연락이 왔다. ".. 혹시 괜찮으시면, 다음번에 저녁 식사를 같이 할 수 있을까요..?" 바른 연애의 정석같이 예의 바르고 깍듯한 그 사람의 태도가, 대화법이 참 좋았다. 첫 만남에서부터 우리는 할 말이 끊이질 않았다.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맥주 한 잔이 두 잔이 되는 내내 둘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헉, 정말요? 저돈데!" 였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 나와 취향이 같은 사람, 내가 말하는 포인트를 귀신같이 이해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남자 여자를 통틀어서 그랬다. 내 가족보다, 친한 친구보다, 과거 사랑했던 그 어떤 남자보다도 나와 쏙 빼닮은 사람이었다.
첫 데이트가 끝나고 신나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있잖아, 드디어 소울메이트를 만난 것 같아. 완전 내 남자 버전이라니까? 그 사람 입으로 그렇게 말했어! 내가 자기의 여자 버전인 것 같아서 소름 끼칠 정도라고-. 실제로 오랜 시간 내 이상형은 '나의 남자 버전'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소울메이트를 찾아냈으니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데이트가 이어졌고 그는 역시나 연애의 교과서처럼 네 번째 만남 즈음에 나에게 교제를 제의했던 것 같다. 놀랍게도 그때 나는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여전히 그 사람과의 대화는 즐거웠고, 이토록 깊이 있고 지적인 남자를 만난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니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한 치의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오직 한 가지 문제는, 이성적인 끌림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아주 조금도!
"아, 원래 내가 좀 천천히 마음을 여는 편이라.." "낯을 좀 가려서..."와 같은 말로 에둘러 말했지만 그는 의외로 직진하는 스타일이었다. "만나면서 알아가면 되지~!" 거기서 칼같이 거절하는 게 맞았을까. 하지만 내 소울메이트인걸? 내 머리는 분명 이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은데, 마음- 아니 몸은 왜 조금도 따라주지를 않냐고. 사귄 첫날 그는 내 손을 덥석 잡고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이상하게 나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어색하고 싫었다. 사실 나는 절대로 천천히 마음을 여는 스타일도, 낯을 가리는 성격도 아니다. 사랑에 있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코뿔소처럼 달려드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전 경험해 본 적 없는, 요상한 연애가 시작이 되긴 되었다.
그런데 사귄 첫날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늦은 시간인지라 버스가 끊겨 택시를 잡아 주긴 주었는데, 나를 태우고 문을 닫으며 "택시 번호 기억할게~!"라고 말했던 것이다. 사실 나는 매너 좋은 그가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할까 봐 혼자 가도 괜찮다며 거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와 있는 게 숨 막혀 빨리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다행이긴 한데, 왠지 여러 가지로 기분이 찜찜했다. "하아-"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을 내쉬는 순간, 택시 기사님의 방언이 쏟아져 나왔다. "아니, 저 놈이 남친이야?" 로 시작된 말은 이 시간에 여자 친구를 혼자 보내는 놈이 어딨냐-, 택시번호 기억하면 개뿔 뭐 어쩔 거냐 무슨 소용이 있냐-, 택시기사만 몇십 년 짼데 딱 보면 사이즈 나온다, 저런 놈은 만나주면 안 된다-, 택시비 3만 원 넘게 나와도 데려다 줄 놈은 다 데려다준다, 안 되면 적어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면서 택시비라도 쥐어주지 저게 뭐냐, 마음 있으면 저렇게 안 한다 아가씨 무시하는 거다, 사귄 첫날인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심지어 왜 약속을 지랑 가까운 동네로 잡냐 자기 좋은 데 산다고 아가씨 얕잡아보는 거 아니냐- 까지 무궁무진하게 이어졌다. 기사님도 나만한 딸이 있다고 했다. 첫날부터 남의 입을 통해 남친 욕을 한 바가지 듣는 경험이란 꽤 흥미진진했다. 그는 물론 기사님이 말한 것보다야 훨씬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것도, 나를 쉽게 봐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적어도 남의 눈에 그렇게 보이도록, 날 졸지에 그렇게 안쓰럽고 처량한 신세로 만든 게 기분이 좋진 않았다. 택시에서 내려 그와의 통화에서 장난스럽게 "오빠 택시 기사님한테 욕 엄청 먹은 거 알아요?" 말을 꺼내자 그는 그렇게 답했다. "아-, 어쩐지. 내가 번호 기억한다고 해서 기사님이 불쾌해하셨지?"
나쁘진 않은데 센스와 눈치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알면 알수록 그랬다. 취향과 취미는 같았지만 성격은 완전히 달랐다. 나는 외향적이고, 그 사람은 내향적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망나니고 그 사람은 선비였다. 둘 다 자신과 비슷한 성격만 만나다 다른 스타일의 연인을 처음 만나는 거였다. 그래서 긴장되지만 동시에 설레고 신난다고 그는 그렇게 예쁘게 말했다. 반면 하루하루 나는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니 일단 남자 친구랑 손 닿는 것도 싫은데, 연애를 어떻게 해? 그런데 또 내가 아는 철학자, 작가들을 그가 다 알고 있고- 아니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고 예술 영화에 대해 깊이 얘기를 나누고 내가 읽는 책에 관심을 가져주고, 그러니 섣불리 싫어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너무 착하고 바른 사람이었단 말이다. 아 이런 사람이 진짜 좋은 남편감인데, 이런 사람이랑 결혼을 해야 하는데 대체 왜 끌리지가 않니.... 소울메이트를 눈 앞에 두고도 마음을 주지 못하는 내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내 인생에 손꼽힐 만큼 기묘한 순간이 찾아왔다. 여느 때와 같은 고상한 데이트였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일생을 다룬 예술 영화를 보고,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소울메이트'로 넘어왔는데 그가 이렇게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가는 모임에 친한 형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 파울료 코엘료의 '브리다'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게 마녀들의 이야기거든. 그 책에서는 소울메이트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한대." 거기서 진작 멈췄어야 하는데, 나는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문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이마에 표식이 있어서 소울메이트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데, 세상에 단 한 명만 있는 게 아니래." 불길한 예감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하지만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전생, 혹은 그 전 생에서 함께 영혼을 이루고 있던 일부가 환생을 거듭하며 세상 곳곳으로 흝어지게 되는데, 같은 몸과 영혼을 구성하고 있던 조각들이 서로를 다음 생애에서도 알아본다는 거지. 그게 소울메이트래. 그럴듯하지 않아..?" 그럴듯하다. 하지만 나는 어색하게 굳은 얼굴로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주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내 뇌리에, 가슴 깊이 박힐 만큼. 내가 소울메이트를 기다리게 된 이유일지도 모를 만큼. 아니 그러니까 그건 불과 며칠 전, 내가 그에게 직접 해 준 이야기였다.
그가 어찌나 실감 나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내 입에서 나온 말을 나에게 그대로 들려주었는지 나는 황당하다 못해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뭐야, 고작 2-3일 전에 내가 말한 걸 기억을 못 한다고? 기억 상실증인가? 어디 뇌에 이상이 있나? 아니면, 쌍둥인가? 로봇인가? 뭔가 오류를 일으켰나..? 대체 뭐지? 어떻게 그게 내가 한 얘기라는 걸 인식 못하고 저렇게 뻔뻔하고 자연스럽게, 남이 해 준 얘기라고 말할 수 있지..? 어떻게 지금 내 얼빠진 표정과 밋밋한 반응을 보고도 뭔가 잘못된 걸 눈치를 못 채지? 혹시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건가? 내가 처음 '브리다'를 들었을 때부터 바로 얘기했어야 하는데, 지금 말하긴 너무 늦었겠지...?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아주 생소한 당혹감이었는데, 당연히도 그 사건은 그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진 않았다.
이별을 고하려 결심한 날, 비가 내렸고 그는 약속 장소에 늦게 나타났다. 최대한 빨리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열심히 찾아봤다며 마사지 카페를 데려가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색하게 나란히 안마의자에 앉아 약 한 시간 동안 말없이 안마를 받고, 몸에 좋은 건강차를 마시고, 또 카페로 갔다. 내가 커피를 샀다. 참 해맑고 못해 청초하기까지 한 그를 보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만 가득했다. 아 이렇게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내가 실수하는 걸까 싶었지만 손은 여전히 잡고 싶지가 않았다. 마음을 굳게 먹고 "오빤 정말 좋은 사람이지만..."을 시전 했다. 그의 반응은 역시나 고고한 선비 같았다. 놀라고 서운한 기색이었지만 내 의사를 존중해 주었고 훈훈한 덕담까지 잊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지게끔 배려해주는 그야말로 진정 좋은 사람, 멋진 사람이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기에 결국 물어봤다. 브리다 얘기는 내가 한 거라고, 기억 안 나냐고. 재밌게도 그는 토끼 눈을 뜨며 부정했다. 아니라고, 자기가 분명 똑똑히 기억한다고. 그 모임에 그 형이 분명, 몇 명이 모였을 때, 어떤 상황에서 말한 거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까지 했다. 내가 우리가 만났던 날짜와 상황, 앞뒤에 이어졌던 이야기까지 줄줄이 읊어주자 그때야 헐... 정말? 하며 정신이 드는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결론적으로는 일부러 그랬던 것도, 회선 오류를 일으킨 인공지능도 아니었고 그저 인간 뇌가 가진 한계였던 모양이다.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쉽게 왜곡될 수 있는지, 사실이 아닌 것조차 굳게 믿게끔 하는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결국 소울메이트인 줄 알았던 그와는 아이러니하게도 '소울메이트' 때문에 영영 멀어지게 된 것이다.
모르겠다. 그가 정말 어느 생애쯤 나와 같은 영혼을 구성하고 있었던 걸까. 세상 곳곳에 흩뿌려진 내 수많은 소울메이트 중 하나였을까. 감사하게도 나는 내 인생에 그를 겪은 이후부터 소울메이트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세상에 나와 완벽히 같은 존재는 없다는 것, 어떤 사람에게든 허술한 빈틈은 존재한다는 것, 도리어 '소울메이트'라는 허상의 틀에 갇혀 상대의 진정한 본질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소울메이트를 믿는다. 하지만 그건 꼭 내 또래 이성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구멍가게의 할머니일 수도, 새로 사귄 절친일 수도, 내 곁의 반려동물일 수도 있다. 그러니 꼭 소울메이트와 연애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단순하게 살겠다. 그냥 내 머리가, 마음이, 몸이 한 박자로 끌리는 그런 사람과 사랑에 빠질 것이다.
[ⓒ 사회가치 공유 언론-소셜밸류.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