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한번 해볼까] 2회
배우자의 기준
이수민
kwonho37@daum.net | 2019-11-04 09:44:00
배우자의 기준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그 기준을 정할 때 만큼은 정말 진지하고 신중해야 한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 포기 못하는 것, 참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따져물으며 생각을 곱씹고 다듬는 과정을 대충 해버리면 안 된다. 배우자의 기준은 곧 결혼 생활의 예고편이다. 스스로 납득할만한 기준 없이 어영부영 배우자를 골랐다가는 자잘한 풍랑에도 흔들리는 '인생'이라는 배가 '결혼'이라는 거대한 암초를 만나 좌초될지도 모른다.
지난 연애의 흑역사는 배우자의 기준을 정하는 데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연애는 두 사람만의 은밀한 사회적 관계 맺기를 통해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성의 어떤 말과 행동에 가장 상처받는지를 알게 해 준다. 결혼 전 만난 구남친들은 배우자의 기준을 명확하게 정립시켜 준 은인들이다(헤어질 땐 욕을 퍼부었지만, 지금은 정말 감사한다). 그들과의 관계가 파토난 결정적 이유는 고스란히 결혼 상대를 고를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조건이 되었다.
구남친1은 잘생기고 착했었다. 연애에 서툴 시기라 그저 나에게 잘해주는 게 좋았고 그의 훤칠한 외모가 내 자존감을 높여줬다. 대화도 잘 통했던 것 같다. 주로 내가 말하고 그는 잘 들어줬다. 우리 관계에서 나는 공격수였고 그는 수비수였다. 나는 숨차게 그라운드를 누비며 호시탐탐 공격 포인트를 노렸고 그는 엉거주춤 막는 척만 하다 주저앉곤 했다. 그는 착했지만 우유부단 했고 미래가 없었다. 나보다 4살이 어렸는데, 어리니까 그럴 수도 있지 라며 밑빠진 독에 물 붓는 심경으로 3년 만나고 결국 차였다. 헤어짐의 이유는 내가 부담스럽단 거였다.
구남친2는 정말 착했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다 우연히 만났는데 나를 너무 지고지순하게 좋아해줘서 끌렸다. 나는 이때까지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다.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구남친1을 겪은 뒤 그보다 더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사람을 골랐다. 구남친2도 미래에 대한 포부나 야망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나를 이양받겠다는 오기나 투지도 없었다. 나에게 모든 걸 맞춰주는 착한 사람이었지만, 결혼이라는 화제만 나오면 바퀴벌레가 장롱 밑으로 사라지듯 순식간에 투명인간이 되어버렸다.
나는 참 우직하게도 오랫동안 그들을 만났다. 나는 왜 그들과 결혼하지 못했을까? 미래가 없어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들과는 애초에 나이와 학력이라는 현실적인 조건이 맞지 않았다. 세기의 사랑도 부모의 반대 앞에선 쪼그라들기 마련인데, 우리 부모님은 저 두 조건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분들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면서도 '난 그런 조건 따윈 신경 안 써'라는 쿨병 환자 같은 태도로 연애에 뛰어든 것이었다. 오랜 연애를 정리하며 깨달았다. 그 조건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건 나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걸.
나이와 학력이 비슷하고, 생활력이 강한 사람. 지난 연애를 통해 신중하게 정한 배우자의 기준이었다. 현재 배우자는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다. 지역과 종교도 일치해서 아직까지 가치관 문제로 크게 충돌한 적은 없다. 나이가 비슷하니 서로 향유해온 문화가 비슷하고, 학력이 비슷하니 주변인들이 사는 모습이 비슷했다. 둘 다 생활력이 강한 편이라 서로가 그리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청사진도 제법 비슷했다.
예전엔 배우자의 조건을 대놓고 따지는 사람들이 참 낭만 없다고 여겼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내가 통과 못할 기준을 상대에게 적용시키는 건 염치 없지만, 나 또한 그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기준을 세우고 그걸 상대하게 요구하든 그건 개인의 마음이다.
어느 결혼이나 불행의 비중은 비슷하지만 불행의 장르는 저마다 다르다. 나는 부모의 반대라는 장르만큼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죽어도 피하고 싶은 장르가 있다면, 그걸 배우자의 기준에 대입시켜보길 권한다. 예고된 불행만큼은 미리 알고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다.
[뮤즈: 이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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