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셋, 네팔] 8회

Would you like a cup of tea?

KWON YOON JIN

kwonho37@daum.net | 2019-12-20 01:09:00

예정대로라면 나는 딸 마을에서 아침을 맞이했어야 하지만 지프 기사가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렀으므로 가까운 샹게 마을에서 눈을 뜨게 되었다. 생애 최초의 침낭 시도는 낭만적이지 않았다. 침낭에서 나는 그득한 똥 냄새는 모태 비염 쟁이 따위는 가뿐히 무시하고 밤새 자태를 뽐냈다. 침낭이 아니라 닭 또는 오리 혹은 거위의 현신 같았다. (그 안에 누구의 털이 들어 있을지는 신도 모를 것이다.) ‘양계장을 하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정품 침낭을 사지 않은 벌을 호되게 받은 걸지도 모르겠다. 이런 저가의 침낭들은 사육장의 떨어진 털들, 그러니까 배설물과 범벅이 되어있는 그런 남은 털로 충전된다고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났다. 추운 겨울에 굳이 집을 놔두고 밖에서 별들과 낭만을 즐기겠다며 살아있는 조류의 털을 무지막지하게 뽑아내 가득 채운 침낭에서 자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요 근래 겨울철만 되면 보이는 롱패딩 행렬을 볼 때마다 나는 새들의 비명을 들었다. 얼마나 뜨끈한지 실내에 들어와 롱패딩을 벗으면 반팔이 드러나는 광경도 심심찮게 목격했다. 그냥 긴 팔을 입고 좀 더 불편하게 껴입으면 그렇게 열악한 사육장에서 반항 한 번 못해보고 산 채로 털을 뽑히는 새들이 줄지 않을까. 나의 편안함에는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한가. 내 침낭 안의 털도 마찬가지로 산 채로 또는 죽은 채로 뽑힌 결과물이었다. 냄새 따위에 불평하는 내가 우스웠다. 그들은 삶을 바쳐 나에게 동사를 면하게 해 준 것이다.


똑똑. 라잔이 문을 두드렸다. 아침 메뉴판을 들고 서 있는 그는 지나칠 정도로 예의 발랐다. 침낭이 케이스에 들어가질 않아 무지 애먹는 나를 보고 성큼 본인이 하겠다고 했다. 지나치게 공손한 라잔은 나도 그에 응당한 예의를 차리게 만들었다. 물론 내가 비용을 지불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포터와 가이드 외의 업무를 당연하게 시킬 수는 없는 거니까. 이건 내 침낭인데 내가 해야지. 트래킹 하는 동안 밤마다 침낭 꺼냈다, 아침마다 침낭 넣었다 할 텐데 빨리 익숙해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침낭 패킹은 유목민에 대한 존경심을 자아내게 했다.



이 날의 길 풍경


아침으로 양파 오믈렛과 블랙밀크티를 시켰는데 오믈렛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계란부침이 있었다. 김밥 속재료로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포터 라잔이 먹는 라면이 참 맛있어 보였다. 함께 먹자고 권했는데 라잔은 나를 불필요하게 접근하는 다단계 사원을 대하듯 괜찮다고 했다. 네팔에서는 이성간 겸상이 금지인가? 한 테이블 건너 앉은 라잔의 라면을 끈질기게 쳐다보며 다음 날 아침에 같은 것을 먹겠다는 다짐을 했다. 포크와 나이프로 계란 지단을 다 먹어갈 때쯤 어제 저녁에 본 다른 여행자들이 식당에 왔다. 그런데 카트만두에서 새벽 4시에 맹렬히 짐을 싸던 커플 중 남자만이 나타나 아침을 시켰다. 전 날 저녁에도 혼자였던가? 아는 척하려다가 잠자코 자리를 떴다. 왜 혼자 왔을까? 원래부터 혼자였나 아님 싸웠나? 그리고 나는 대체 왜 그런 게 궁금했을까. 남의 불행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선한 마음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같이 먹자는 말에 광속도로 지나가는 라잔와 앞에 놓인 계란부침개(오믈렛) 그리고 연보라색 벽의 조화


이 날을 원래 어제 갔어야 할 딸 마을 까지 걷기로 했다. 물론 두어 마을 더 가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굽이 낀 강이 흐르는 딸에 꼭 묵고 싶었다. 네팔에 트래킹을 간다고 하면 두꺼운 패딩에 산소 호흡기쯤 달고 헉헉대는 상상을 하는데 5,000 미터 급까지 가는 데 그런 것들은 필요 없다. 한국에서 등산할 때처럼 경주하듯이 달리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땀이 아주 살짝 나는 정도까지만 유지하고 심장박동 수가 지나치게 빨라지지 않도록 체크하며 걷는다. 걷는 시간도 아침 일찍 7~8시 정도에 시작해 오후 2~3시 안에 끝내고(히말라야는 늦은 오후부터 금세 기온이 내려간다.), 중간에 점심 먹고 차도 마실 시간까지 감안하면 종일 5시간 정도 걷게 된다. 그러므로 고산병과 기타 질병만 주의한다면 체력적으로는 오히려 하나도 힘들 것이 없다. 산 좀 탄다고 자부하며 빨리 걷는 이들에게 고산병이 더 잘 찾아온다는 것을 보면 히말라야는 느긋한 여행자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



행복한 권윤진씨, 저 빨간 나무는 자주 보였는데 "실림" 나무라고 라잔이 알려줬지만 아무리 구글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다.


ACT 라운딩은 다른 트래킹 루트보다 기간을 길게 잡아야 해서 사람이 적은 편인데 게다가 비수기라 더없이 한산했다. 그저 네팔에 왔다는 사실에, 안나푸르나 자락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워 바보처럼 헤헤 웃으며 걸었다. 풍경을 바라보는 호사. 내게 볼 눈이 있고 걸을 다리가 있다는 사실. 벅찬 마음이 들었다. 벅찬 마음과 여유 있는 걸음걸이만큼 어울리는 것이 또 있을까. 갑자기 라잔이 내게 음악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설마 K-POP 이야기를 꺼내려고 저러나 하는 와중에 수줍게 노래를 들으면서 가도 되겠냐고 재차 물었다. 끄덕이는 나를 보곤 그는 얼른 핸드폰의 볼륨을 풀로 올렸고, 히말라야에는 네팔의 뽕짝이 넓게 울려 퍼졌다. 그는 20대였다.




작은 체구로 참으로 잘 걷던 라잔. 저 멀리 앞에 간다.


걷는 중간 중간 작은 식당 겸 카페들이 보일 때마다 20대 청년 라잔이 차를 마시겠냐고 습관처럼 물어봤다. 차를 참 좋아하거나 쉬고 싶거나 둘 중 하나겠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차를 한 잔 주문하면 함께 온 가이드에게 무상으로 차가 제공된다고 했다. 네팔의 경제를 위해서도, 가이드의 휴식을 위해서도,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호사를 위해서도 찻집은 필수다.


Would you like a cup of 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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