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태도] 연재 종료
2회 좋은 글을 쓰고 싶다
김영
kwonho37@daum.net | 2019-12-23 23:27:00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이 욕망에는 보통 기술적인 질문들-뭐에 대해서, 어떤 장르의 글을 쓰고 싶은데? 작가가 되고 싶은 거야?-이 따라 나온다.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건 꽤 오래된 욕망이고, 가끔 나는 뭔가를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쓰인 건 무엇에 대한 것도, 어떤 장르도 아닐 때도 많다.
어쨌든, 경험상 잘 쓰는 일에는 왕도가 없었다. 불쑥 튀어나온 글이 몇날 며칠 고민해서 부담스러워진 글보다 좋기도 했고, 그 고민이 언젠가 조금은 더 괜찮은 글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글 잘 쓰는 법’ 같은 제목들은 클릭하게 된다. 어쩔 수가 없다. 얼마 전 유투브에서 ‘대통령의 글쓰기’의 저자 강원국 씨의 강연 영상을 봤다. 그는 이런저런 (정말로 유용한!) 비법들을 전수해주고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라고, 좋은 사람의 글이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즉각 반발이 들었다. (인정한다. 이건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여서다.) 그렇다면 처음 접한 작가의 글이 심금을 울리는 건, 얼굴도 모르는 작가의 글이, 100년 전 먼 타지에서 쓰인 글이 좋아버리는 건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이런저런 반례들을 생각하는데, 문득 한 얼굴이 떠올라버렸다.
대학교 4학년 때 들은 한 교수님의 수업은 독특했다. 문학작품을 읽고 글을 쓰는 게 수업의 전부였다. (물론 절대 만만한 작품들은 아니었다.) 학생들이 글을 인터넷에 올리면, 교수님은 그것을 학생 수만큼 프린트해서 들고 오셨다. 작은 몸으로 종이뭉치를 이고지고. 우리는 둥그렇게 둘러앉아 그 글들을 읽었다. 나는 글을 안 써갈 정도로 막나가진 못했지만 매번 열과 성을 다해 글을 쓸 만큼 성실하지도 못했으므로, 늘 부끄러운 채로 수업에 들어갔다.
수업의 마지막 과제는 각자 자신의 책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종강 날, 학생들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책들을 소중히 돌려봤다. 나는 ‘나의 책’ 표지에 교수님 서원의 집 한 채 사진을 사용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서원의 창고였다. 사실을 깨닫고서 민망해 하는데, 교수님은 ‘덕분에 창고가 책 표지에도 쓰였다’며 예의 웃음을 보이셨다. 참 그분다운 말이다.
어느 날, 수업을 들었던 제자들이 책모임을 한다는 말에 퇴임한 교수님이 학교까지 찾아오셨다. 교수님께 연락을 드린 친구 덕에 나도 교수님을 뵐 수 있었다. 우리는 소소한 안부 같은 것을 나누고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나는 그 분의 맑음 앞에서 또 부끄러운 채로 (이건 참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인데, 아주 깨끗한 것을 마주하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마음 같은 것이다.) 얼마 안 되는 차를 괜히 여러 번 나눠마셨다. 헤어지는 길, 교수님을 포함한 일행과 나는 서로 가는 방향이 달랐다. 쭈뼛쭈뼛 서 있는데 교수님이 나를 안아주셨다. 허리 숙여 안은 그분의 품이 정말로 따뜻했다.
그 포옹은 나를 지탱하는 것들 중 하나다. 세상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 같은 순간에, 내가 스스로를 싫어하지 않기 위해 떠올리는 것이다. 세상에 그런 품이 있다는 사실, 그 품이 나를 안아주기도 했었다는 사실이 말 그대로 전부인 때가 있다.
교수님은 한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신다. 나는 그 칼럼들을 읽을 때 가치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그 글이 교수님 같아서다. 단어와 어미와 표현 하나하나에서 그 분의 맑은 눈과 명징한 통찰과 타인을 위해 동동거리는 몸짓을 읽을 수 있다. 나에게 그것은 좋은 글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지금 유투브에서 본 강연이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쓰고 나니 다른 생각이 든다. 좋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쓰지만,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애쓰다 보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의 욕망에 따르는 질문들에 당당하게 답해야겠다. 글 쓰는 건 태도야. 일종의 명상이라고!
[뮤즈: 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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