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 편집자] 2회 현명한 잔소리꾼 되기
박세미
kwonho37@daum.net | 2019-11-13 22:46:00
“다른 일정이 밀려서 아직 못했어요.”
“며칠만 시간을 더 주세요.”
“이 많은 걸 이때까지 다 하라고요? 안 돼요.”
“아직 저작권사에서 답이 안 왔네요. 조금 더 기다려 주세요.”
제가 일하는 동안 함께 일하는 파트너, 또는 회사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입니다. 출판과 관련된 일에 몸담았거나,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 ‘편집자의 일’이란 책을 내려고 하는 저자에게 원고를 받아서, 그 원고를 교정·교정하는 일일 거예요. 저도 물론 출판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편집자는 틀린 글씨 잘 고치고 글을 매끄럽게 다듬는 일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으니까요.
사실, 교정·교열보다 더 자주, 정말 잘해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독촉’을 하는 일이지요. 이따금 편집자가 편집장으로부터, 저 같은 프리랜서 편집자라면 의뢰받은 출판사로부터 무리한 일정으로 책을 뚝딱 만들어 내라는 요구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통은 편집자가 작가나 화가에게, 또는 디자이너에게 ‘(그래서) 언제까지 작업물을 보내 줄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질문은 생각보다 상대방에게 한번 꺼내기가 어렵고도 괴롭습니다. 미룰 수 있다면, 가능한 한 가장 마지막까지 미루고 싶은 말입니다. 그렇지만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편집자가 고수인지 중수인지 하수인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을 부릴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며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기도 하지요. 기본적으로 일을 미루고 싶어 하는 본성을 지닌 인간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일을 해낼 수 있게 만드는 행위니까요.
저는 편집자로 일해 온 몇 년 동안 늘 ‘언제까지 줄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해 왔는데도, 아직도 이 질문이 영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 질문을 해야 할 때면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어떤 식으로 말하면 좋을지 연습하고 되뇌고 적절한 문장을 몇 번이고 만들어 봅니다. ‘말’로 할 경우, 어떤 표정과 어조와 동작을 할 때 상대방이 기분이 나빠지지 않을지 시뮬레이션합니다. ‘글’로 할 경우, 어떤 단어와 어미로 끝맺을지와 문장이 끝날 때마다 어떤 이모티콘을 붙이면 좋을지까지 생각하지요.
저는 여전히 그저 ‘착한 파트너’로 남고 싶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성에 대한 지표가 절대 ‘책의 완성도’의 지표에 비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싫은 소리 하기’ 항마력을 기르고 ‘현명한 잔소리질’ 경험치를 무한렙업할 수 있는 치트키가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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