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일상의 한 컷] 청소
김민정
kwonho37@daum.net | 2020-07-03 00:57:00
이 글을 빌어 고백한다. 나는 정리를 끔찍이도 못하는 사람이다. 게으른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의자 위에 벗어 놓은 옷을 산처럼 쌓아 ‘옷탑’을 만들거나, 서랍 속에 규칙 없이 물건을 던져 넣어 블랙홀을 만드는 것이 일상이다. 컴퓨터 데스크탑 바탕화면에는 사용하지도 않는 아이콘이 차고 넘치며, 방 한 켠에는 중간쯤 읽다 던져 놓은 책이나 과자 봉지 같은 것이 굴러 다닌다. 이런 너저분함은 어찌 보면 유전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나의 모친도 정리정돈에는 그닥 재능이 없기 때문이다(엄마 미안).
그런데 얼마 전, 회사에서 반강제적으로 책상 정리를 해야 할 상황이 있었다. 부서 위치가 변경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기존 책상의 물건을 꺼낸 뒤, 새롭게 배정받은 자리에서 그 물건을 다시 집어넣는 청소스러운 행위를 하게 된 것이다. 회사에서 하라는데 일개 사원인 내가 반항할 힘이 있을 리 없다. 힘없이 책상 앞에 걸터 앉아 물건을 하나 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소의 필수 과정이겠지만, 갖고 있는 물건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재판을 시작했다. 과연 이 물건은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철 지난 다이어리와 달력들, 오래된 기획안, 예쁘다고 모아놓았던 브랜드 자료들, 심지어 구석에서는 입사 초기의 포트폴리오와 필사 노트까지 나왔다(글을 직접 베껴 쓰는 연습을 하면 필력이 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름의 훈련을 했던 것인데, 고작 3일 하고 끝났다). 모두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확실히 버려야 할 것을 정리하고 나니, 그 다음에는 버려도 될지 망설여지는 물건들이 꽤 많았다. 왠지 읽고 나면 유식해 보인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어려운 소설가와 시인의 책, 자주 쓰는 색은 아니지만 언젠가 사용할지도 모르는 파란색 형광펜, 새것이지만 내 피부 타입과 맞지 않아 넣어두기만 했던 바디 오일은 한참을 붙잡고 고민 했다.
대부분 ‘아마도’ ‘혹시’ ‘어쩌면’처럼 불확실한 희망을 품고 있는 것들이었다. 이미 나에게 맞지 않는 물건이라는 것을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참을 고민 끝에 모두 버렸다. 그것은 쓸데없는 희망과 기대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것처럼 묘한 쾌감이 있었다. 그렇게 모두 버리고 나니 비로소 눈앞의 것이 또렷이 보였다. 지금 상황에서 꼭 읽어야 할 책, 더욱 아껴서 사용해야 할 펜과 다이어리, 내 취향이 담긴 컵이 말이다. 청소를 한다는 것은 수많은 잔가지를 쳐내고 현재에 집중하는 행위가 아닐까. 정말 오랜만에 청소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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