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탐구생활] 3회

그 남자의 미투

송재훈

kwonho37@daum.net | 2019-12-15 16:49:00

*사진출처: [shutterstock.com]

나는 중년 남성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학식이 있고, 명망이 높은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그들에게 공공장소나 식사자리에서의 매너, 배려와 성찰 능력 등을 기대하지 않는 것은 20년 이상 한국에 살면서 학습된 결과이다. 물론, 모든 중년 남성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믿었다가 발등이 깨지는 것보다는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조금 감동적인 모습을 보게 되더라도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는 것은 언제나 현명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곤 했다. 이번 사건에서도 나는 나의 생각이 옳았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날씨가 선선했던 어느 날,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연구실에 있던 사람들과 야외 휴게실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때마침 우리 과의 남자 교수 한 분이 한 손에 담배를 쥔 채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그는 우리와 매우 가까운 자리에 앉았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여자 후배 한 명이 잠시 안절부절못하다가 담배를 들고 있던 손을 재떨이까지 미처 뻗지 못하고 재빨리 테이블 밑으로 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그는 “괜찮아, 괜찮아. 편하게 피워.”라고 말하며 자신은 고작 이런 것으로 학생들을 불편하게 하는 꼰대가 아닌, 쿨한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여 “근데 이런 것도 참 젠더화 된 것 같아.”라며 남학생들은 흡연 중에 교수가 다가가도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우지만 유독 여학생들의 경우에만 눈치를 보고 어려워한다고 이야기했다. 그가 이 사례에서 “젠더화 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남자와 여자의 서로 다른 매너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꽤나 인상깊었다. 하지만 역시 그도 내가 생각하는 “중년 남성”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 학교에서 학계에서의 미투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쿨한 교수님”도 있었다. 발표자가 말을 이어 나감에 따라 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몹시 언짢지만 발표를 끊을 순 없으니 일단 참고 있겠다’는 표정이었다. 발표가 끝나자마자 그는 손을 들었고 약간 고조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그는 요즘의 미투 운동이 지나치게 남성들을 가해자화 하고, 여성들을 피해자화 하는 문제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남성은 가해자고 여성은 피해자라고 하지 않았지만, “공교롭게도” 발표에서 사례로 제시된 사건들 중 대다수의 경우에 남성이 가해자였던 것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마자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손을 들었고 반박이 이어졌다. 흥분한 그는 발언권이나 발언 순서 따위는 무시한 채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니, 남자도 피해자일 수 있지. 나도 전에 해외에서 연구하다가 남성 동성애자들한테 성폭행 당할 뻔했는데! 그때는 내가 힘이 세서 빠져나왔지.” 갑작스러운 그의 미투에 여러 의미로 놀란 사람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 자리에서, 이 맥락에서, 이런 식으로 고백을 함으로써 그가 얻고자 하는 효과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미투는 정말 그가 주장한대로 정체성의 정치의 한계를 지적하고, 더 큰 연대의 가능성을 보아야 함을 설파하기 위해서였을까?



그러나 해외의 몇몇 학회에서 도입하고자 하는 성폭력/성차별 ‘원 스트라이크 아웃제’에 대한 이어진 그의 발언은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했다. “아니 사람이 그게 차별인 줄 모르고 할 수도 있는데, 잘못된 발언을 했다고 하면서 바로 자격을 박탈해버리고 그러면 무서워서 누가 자유롭게 발표를 하고 토론을 할 수 있겠어요?” 자유한국당부터 시작해서 “자유”가 고생이 많을 때가 많다. 과연 그가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걱정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것은 무엇이, 왜 성폭력/성차별인지 생각해 본적 없고, 앞으로도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예민한” 여자들에 의해 가해자로 지목될지도 모르는 남성인 자신에 대한 염려는 아닐까? 한참동안 발언권을 독점하고 마음 속에 있는 말을 모두 쏟아낸 그는 무섭고 걱정이 되어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는지 중간에 쿵쾅쿵쾅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날 그의 미투에는 아무도 위드유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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