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셋, 네팔] 5회
아리아드네가 필요해
KWON YOON JIN
kwonho37@daum.net | 2019-11-21 01:52:07
침대 머리맡에는 직사각형의 작은 창문이 있었다. 정수리가 벽에 닿을 정도로 창에 가까이두면 방 안에 가득 찬 체취를 약간이나마 희석할 수 있었다. 하룻밤만 묵는다는 것이 참 다행스러웠다. 카트만두와 결벽증은 도통 어울리지 않았지만 깔끔 떠는 사람들을 비웃던 나는 한국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창문 너머로 근처 건물의 아름다운 정원에 오후 햇살이 퍼져 있었다. 누워서 멍 때리며 보기 참 좋은 풍경이었지만 곧 일어났다. 당장 내일 시작하는 라운딩을 위해 가이드 겸 포터와 사전만남을 하고, 침낭을 구매하고 환전을 해야 했다.
출국을 앞둔 며칠 전, 라운딩을 함께하기로 한 포터에게 연락이 왔다. 네히트(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카페)에서 극찬을 받은 가이드 겸 포터 대니쉬 라이였다.
“친구에게 EBC(Everest basecamp) 트레킹 문의가 왔어요. 라운딩은 위험하지 않아 누가 가이드를 해도 괜찮은데 EBC는 위험해서 친구 대신 제가 가야할 것 같아요. 그래도 당신이 '굳이' 저와 라운딩을 하겠다면 원래대로 진행할게요. 부담 없이 대답해주세요.”
네팔 버전 답정너였다. 그렇게 구구절절 말했는데 '굳이' 약속한대로 당신이랑 가겠다고 우기면 15박 16일을 과연 편히 지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친구를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절대 EBC 가이드 비용이 더 비싸서 돈 욕심에 그러진 않았을 거라 애써 생각했다.)에 손사래를 칠 수가 없었다.
“그래요. 그렇게 하죠.” 짧고 뭉툭하게 답했다.
신뢰도 높은 포터를 찾아 인터넷에서 열심히 헤맨 나의 허무한 시간을 생각하니 씁쓸했다. 뭐 어쩌겠는가. 계획은 무의미해졌다. 대니쉬 라이는 최소한의 상도덕이라 생각했는지 사전만남에 대신 동행하기로 한 포터 라잔 쿨룽과 함께 ‘굳이’ 나왔다. 멋쩍게 웃던 대니쉬와 수줍게 두 손 모아 합장해 인사하던 라잔. 그 모습 뒤로 나무에서 눈송이처럼 퍼지는 하얀 꽃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16일간 나의 짐을 들어주고 길을 안내해 줄 귀한 인연이었다. 대니쉬와 라잔이 라운딩 계획을 세심히 살피며 내용을 조율하는 동안 체력이 된다면 라운딩을 끝내고 ABC트래킹을 하자는 내 야심찬 포부도 드러냈다. 마음은 이미 K2 정상에 올라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10도까지 사용 가능한 다운 침낭을 75,000원에 샀다. 네팔은 난방이 없다. 집은 그저 바람과 비를 막아줄 뿐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온이 떨어지기도 하고, 이불에 벼룩 또는 이가 있을 수도 있어 침낭은 필수다. 생애 최초로 구입한 침낭에서는 새똥 냄새가 강하게 났다. 추위와 냄새 중에서 택해야 하는 트래킹임에도 가슴은 마구 뛰었다. 정말로 히말라야에 간다. 언제부터 꿨는지 희미해질 정도로 오래된 꿈은 다음 날 현실이 될 예정이었다.
표고버섯 직원에게 큰 배낭을 수화물로 부칠 때 넣어 온 가방을 맡겼다. 우리의 어깨는 소중하므로 트래킹에 필요 없는 짐은 보통 숙소에 맡겨 둔다. 한 달 후에 찾으러 오겠다고 하니 곤란한 눈치였지만 그는 내 인적사항을 하나도 적지 않고 가방을 받아갔다. 갑자기 두려워 졌다. 나중에 다시 찾을 수 있을까. 혹시 내 이름을 적어둘까 물었는데 그는 필요 없다고, 본인이 기억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자신감에 압도된 나는 조용히 방으로 올라갔다. 포터가 멜 배낭과 내 배낭을 구분해 짐을 싸야했다. 터질 것 같은 배낭에 침낭을 구겨 넣으며 매일매일 이 짓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포터는 짐을 들어줄 뿐, 패킹은 고스란히 본인의 몫이었다.
세면도구를 챙겨간 샤워실은 화장실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았다. 화장실 세 칸 옆에 빈약한 커튼 뒤로 샤워기라고 부르기는 조금 모자란 물 호스가 있었다. 턱없이 모자란 수압과 미지근한 물 온도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그곳은 그게 더 자연스러웠다. 각도를 섬세하게 조절해야 하는 물 호스 사용법의 요령을 익혀가며 씻는 동안 화장실에는 여러 사람이 다녀갔다. 숙소가 혼방인지, 샤워실이 그렇게 열악할지 예상 못했던 나는 자칫 힘을 줬다간 픽하고 기울어 버릴 것 같은 2층 침대에 힘겹게 올라 몸을 뉘였다. 기껏 지도에 마킹 해놓은 카트만두 맛집들은 하나도 찾지 못했다. 길치에게 카트만두 타멜의 거리는 라비린토스와 같았다. 하지만 내겐 아리아드네가 없었기에 아무데나 들어간 음식점에서 이태원 밥값보다 비싼 카레를 먹으며 입 안에 도는 쓴 맛을 느꼈다. 안나푸르나 전의 최후의 만찬은 이런 것이라고 위로하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몇 번을 헤맸는지 그날 타멜에 뽀얗게 일어난 매연과 흙먼지는 내가 제일 많이 마셨을 것이다. 여행을 시작하고 계획대로 되지 않은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두둥실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몸을 뒤척였다. 조용한 방 안에 삐걱 소리가 청명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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