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 잡문집] 2회 일부러 불편하게

[뮤즈] 치치 작가

권호 기자

kwonho37@daum.net | 2020-03-21 00:08:00


세계적인 한 건축가는 집을 설계할 때 일부러 불편하게 짓는다고 했다. 지금은 모든 분야에서 어떻게 하면 더 빠르게, 더 편리하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는 세상인데, 일부러 불편하게 만든다는 건 내게는 너무 어려운 철학처럼 느껴졌다. 가만가만 그의 건축물을 상상해보았다. 문득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너무 바쁘게만 살고 있는 현대인들을 위해 하늘을 올려다볼 기회, 마당을 걸으며 들풀이나 꽃을 마주할 기회, 조금이라도 움직여서 몸을 더 건강하게 할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며칠 전에 한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내 지인들 중에서도 유난히 도회적인 외모를 지닌 사람이었다. 친구는 서양식보다는 전통적이고 한국적인 것을 좋아하고, 편리한 것보다는 조금 불편한 것, 정돈된 것보다는 흐트러진 것에서 매력을 느꼈다. 친구가 사는 집은 1960년대에 지어진 주택인데, 마당에는 아주 작은 텃밭이 있다고 했다. 작년에 이사해서 처음으로 무를 심었는데 그럭저럭 무의 형태로 자라나 손수 무말랭이와 시래기를 만들어 먹었다고. 나무벽으로 된 집이라 이사하자마자 물걸레로 빡빡 문질러 닦는데 새까만 구정물이 계속 나왔다며 말갛게 웃었다.

내가 “오래된 주택이면 춥지 않아?” 하고 물었더니, 그녀는 “추위는 견딜 만한데, 겨울이라 텃밭에 아무것도 없는 풍경이 쓸쓸해” 하고 답했다. 튤립도 심어져 있는데 어디서 언제쯤 불쑥 올라올지, 아니면 영영 자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서울이지만 서울이 아닌 것 같은 옛날 집에서 예측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일상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작년에 만난 그녀는 어딘가 조금 힘들어 보이고 우울해 보였다. 하지만 며칠 전에 만난 그녀는 말할 때마다 생기는 주름이나 표정에서 묘한 생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내 친구는 세계적인 건축가가 우리들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삶의 지혜를 이미 깨닫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와 내가 매일 밤 잠을 청하고, 매일 아침 하루를 열고, 샤워를 하고, 끼니를 먹는 이 공간을 쭉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편리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이 집에서, 나는 어떤 일상을 살았고, 살고 있고, 또 살아가고 싶은 걸까.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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