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아, 김이솝] 0. 탕아일체 (蕩我一體)
심규락
kwonho37@daum.net | 2019-08-08 16:42:44
[0-1] 그가 돌아왔다.
렘브란트 [돌아온 탕아]
(출처: http://www.wga.hu/art/r/rembrand/14biblic/69newtes.jpg)
“야, 안 때릴 게 고개 들어보라고. 아, 고개 들어보라니까?”
‘쨕!’
“야, 야. 우냐? 울어? 생각해보니 미안, 안 때린다고 했는데 그냥 조금만 더 때릴게.”
‘쨕!’
“뭐, 내 이야기가 풍속을 해쳐? 금서로 지정될 만큼?”
‘쨕!’
“금수 새끼들이 금서를 정할 자격이 되냐?”
1909년 일제강점기, 한 남자가 사무실에서 일본인 공무원들의 따귀를 연신 때리고 있다. 윤치호가 여러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번역 출판한 책 [우순 소리]는 일제에 의해 [금수회의록], [월남망국사] 등과 함께 금서로 지정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의 원작자는 사자의 앞발 처럼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바다 건너온 사람들의 뺨을 다정하게 타격하고 있다. 마침내 5명의 사내가 정신을 잃어 쓰러졌다. 그는 커다란 수염을 다듬은 뒤 이윽고 자리를 뜬다.
‘접때 그 콜로세움 애들보다 타격감이 별로네.’
여기, 가이아 여신이 낳은 인류 최고의 만담꾼이 서 있다.
‘나 때는 말이야, 이야길 아무렇게나 지어놓아도 사람들이 그저 좋다고 조각에, 연극에 다 갖다 만들었는데 말이야. 어떻게 갈수록 애들이 이렇게 버릇이 없지?’
혹자는 동물의 왕이라 부르고, 또 다른 이들은 단지 노예 출신의 이야기꾼이라 부르는 그. 그는 돌아온 탕아, 김이솝이다.
(출처: http://www.youngno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52)
다음 날 아침, 그는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의 한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양고기 대신 돼지 허파를, 요거트 대신 막걸리를 먹고 난 뒤 주막 안으로 들어왔다. 한 눈으로 봐도 조금, 아니 많이 다른 외모를 지닌 그는 퍽 눈에 띈다.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한 채, 이젠 익숙하다는 듯 한쪽에 자리를 잡고 털썩 앉는다.
“주모! 손흥민 극장골처럼 시원한 국밥 하나 주슈!”
“아휴, 소농민을 찾으려면 저어기 산넘어에 있는 소 시장에 가시지 왜 여기서 찾는데요?”
아무도 한 세기 뒤의 인물인 손흥민을 모르나 보다.
“어허 쯧쯧. 저번에 인터넷 초록 창에서 본 ‘축알못’이 이럴때 쓰는 겁가 보네. 요런 축알못들 같으니라구. 허허허.”
탁주에 거나하게 취한 두 사내가 옆자리에서 김이솝에게 말을 건다.
“댁은 누구쇼? 생김새를 보아하니 오랑캐 출신이 아닐까 싶은데. 눈도 부리부리하고 발도 크고 말이오.”
“어허, 이놈들이 내가 어디 출신인 줄 알고!"
볼 빨간 두 사내는 가만히 네 개의 눈을 끔뻑이다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자네들, 그리스라고 들어봤는가?”
“구리…수…? 고로쇠 같은 거요?”
“에이, 그리스! 따라 해 봐! 그, 리, 스!”
초면인 사람에게도 서슴없이 말을 놓는 그. 다시 한번, 그는 돌아온 탕아 김이솝 이다.
“그리스라는 곳은 말이야……”
그리고 이제 그가 입을 풀기 시작한다.
[0-3] 그때와 지금
(출처: https://me.me/i/god-facebook-catholic-179795)
“그리스라는 곳은 말이야, 아 생각해보니 여기랑 비슷하군. 왕도 있고 노예도 있고 종교도 있지, 암 그렇고 말고.”
“댁도 노비요?”
“노비였지. 나 때는 말이야, 커다란 배도 이 맨손으로 옮기고 그랬다 이 말이야. 두고 보라고, 몇백 년이 지나면 자기 집도 없어서 이자의 노예인 젊은이들이 한참 늘어날 거란 말이야. 세월이 흘러도 왕이랑 종놈들밖에 없는 건 똑같아. 자유란 거가 없단 말이야. 이자 빚만 있는 줄 아나? 바보상자가 그러대? ‘태어날 땐 부모에게 빚지고, 살면서는 은행에 빚지고, 죽어선 자식놈들한테 빚진다’ 라고.”
“그럼 댁은 지금 뭐요? 노비가 아닌 거라면 왕이라는 거요?”
붉은색을 넘어, 쌍화차 속 대추의 형상이 된 옆자리 사내는 상체를 가누지 못한 채 김이솝의 옷처럼 하야디 하얀 사발을 집은 채 대뜸 물어봤다.
“신.”
“엥? 뭐라고?”
“노예였다가 지금은 신이지.”
“병신 아니우?”
“난 시간도 내 맘대로 이동하고, 부활도 하고, 그런 썰들을 풀면서 떠도는 신이지.”
김이솝은 마지막 국밥 한 수저를 뜨곤 다시 입을 열었다.
“니체라는 쌍놈 하나가 있는데, 신은 죽었다고 한 놈 말이야. 근데 걔는 틀려먹었어. 내가 바로 살아있는 신인데 말이지.”
[0-4] 엿먹어 니체, 내가 살아있는 신이야
(출처: https://www.amazon.com/Holy-Shit-Living-Lions/dp/B004SHHJPU)
“껄껄껄 그런 상스러운 말 좀 가려서 합시다, 명색이 신 이신 양반이. 아무리 신이라도 그렇지, 나체가 뭐요 나체가.
“쯧쯧쯧, 니체를 모르나 니체를. ‘신은 죽었다’ 이 말 못 들어 봤나.”
지구에 살면서 말 좀 한다는 사람들은 생전에 적어도 한번은 해봤을 그 말, 허무주의의 끝이 서린 그 말에 김이솝은 반기를 들었다. 게다가 엿을 먹이기까지 하는 대담함 까지…… 이쯤 되면 훗날 뇌공학계에서는 그의 머리를 서둘러 연구주제로 삼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왕은 무슨, 신은 무슨…… 그쪽들이 주야장천 말하는 운명이란 것도 사실 다 결과론 적인 얘기거든. 까놓고 말해서 현세에 우리가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게 제일이지, 다 뒤진 다음에 어디에 갇힌 사도세자 마냥 뒤돌아서 ‘아 운명 참 얄궂어…… 그래도 꾹 참고 열심히 살아왔다.’ 이 지랄 하면 무슨 소용이냔 말이야.”
“왕이 있으니까 우리도 이렇게 농사지으면서 먹고 살 수 있는 거 아니우? 그리고 우리한텐 당장 낼 세금이랑 겨울에 먹을 양식 걱정이 먼저지."
“지금 자네들이 농사짓고 있는 토지, 그게 왜 왕의 땅인가? 걔가 쟁기로 땅을 갈았나? 아니면 처음부터 왕이 엽전 주고 산 건가? 왜 자네들이 이런 거에 얽매여서 더 자유롭게 살 수 없는지 생각을 좀 해보라고! 와 찢었다, 이거 꼭 받아 적어라. 알았지?”
“지금 누구한테 받아 적으라고 하는 거요? 우린 글을 읽지도 못하는데.”
그때, 주막 입구에 숨어서 모든 말을 적고 있었던 한 난쟁이가 들어온다.
“팔이 아파요, 그만 적으면 안 될까요……”
그 난쟁이의 이름은 ‘위키’ 이다. 항상 세상의 모든 것을 적어내려고 노력하는 그는 김이솝의 사관 정도로 이해하면 되시겠다. 위키는 모든 정보를 적어내려 하는 욕심이 가득해, 때로는 잘못된 정보도 멋모르고 기록할 때도 있고 때로는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갑론을박하는 때도 있다.
“얘한테도 술 한 잔 줘, 내 사관이야 사관. 내가 신이라고 말했지? 신이 되려면 자서전 같은 게 필요하니까 옆에서 따라다니면서 멋있는 거 있으면 좀 적으라고 시켰지.”
“신이고 나발이고, 당신은 오랑캐인데 어찌 모든 걸 조선말로 다 하우? 체통 좀 지키고 양놈이면 양놈 답게 그쪽 말로 할 생각은 없나? 아니면 그냥 여기 사람 인데 우릴 속이는 거 아니우?”
“쯧쯧, 양놈들 나오는 영화…… 그러니까 움직이는 사진 같은 게 있어! 거기선 이집트 사람이든 프랑스 사람이든 모두 일방적으로 영어, 그니까 그 양놈들 언어로만 나온다고. 게네들도 그러는데 왜 나한테만 그래? 조선말밖에 못 하는 너희한테 맞춰주려고 하는 건데. 이게 바로 신의 관용이다, 이 말이야.”
“에헤이 그건 그렇다 치고! 신 되는 게 쉬운 줄 아시오? 보아하니 그냥 취한 거 같은데, 헛소리 그만하시고 얼른 국밥값이나 치르고, 집에 가 잠이나 자시오! 호호.”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주모는 장난스럽게 말 한 바가지를 부어대었다.
“신 되는 거? 쉽지, 그건 예전이나 나중이나 똑같아. 예전에는 문맹들이 많아서 그냥 멋진 말 몇 번 하고 그거 기록해두면 알아서 종교 서적이 되었지. 어차피 아무도 사실은 잘 모르거든.”
바벨탑 건설을 하는 것이 아닌, 하늘을 아예 땅 가까이 끌어내려는 김이솝은 어느새 옆자리 사내의 술 사발까지 낚아채 탁주 한 사발을 목으로 넘겼다.
“나중엔 어떻게 되는 줄 아나? 똑같아. 그 유투브인가 뭔가 움직이는 사진 같은 빨간 거 있어! 인간들이 그거만 주야장천 봐. 글을 안 읽어. 글도 그냥 자막 같은 글자 파편 쪼가리만 대충 보고 처웃어댄다고. 그게 문맹이랑 다를 게 뭔가? 게네도 어차피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처럼 책 안 읽어, 못 읽는 거일 수도 있고. 그니까 그냥 나도 대충 몇 자 적어서 종교 서적 만들어내면 신 되는 건 금방이라고.”
한참 동안 왕, 니체, 할리우드 그리고 종교를 정신없이 깎아내리던 김이솝의 뒤에는 어느새 검은 그림자들이 서 있었다. 주막 안에는 모두가 도망가고, 김이솝과 그의 사관, 위키 그리고 포도청의 병사들뿐이었다.
“어디서 개소리가 나나 했더니 여기었구나. 왕을 모욕한 죄,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군. 그럼 이제 네 사지 에게도 모욕을 줄 차례겠지? 끌고가라!”
입은 한없이 자유로우나 두 팔은 그러지 못한가 보다. 포승줄에 묶인 김이솝과 위키는 그렇게 노을을 겸손한 자세로 마주하고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김이솝은 역시 신(?)이 될 존재라 하나도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웃고 있었다.
“야, 적어 빨리. 아 지금은 묶여서 못 적지. 그럼 그냥 듣고 기억했다가 나중에 적어. ‘니체로 시작한 그는 헤겔로 마무리를 짓는다. 그렇다, 그는 죽어야 사는 존재이다.’ 와…… 찢었다. 너 이거 기억 못 하면 뒤진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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