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남친이 남기고 간 뜻밖의 선물-
그런 거 없다고요? 잘 찾아봐요, 있을 거예요.
Jess
kwonho37@daum.net | 2020-02-07 16:21:12
살다 보면 좋은 사람을 만나기도 나쁜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그들과 깊은 연을 맺기도 하며 짧게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연인이든 친구든 지인이든 많은 이들을 겪으며 깨달은 점이 있다면 어떤 만남이든 그로 인해 나에게 남겨진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노트북이나 블루투스 이어폰, 14K 반지 같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아낌없이 사랑하는 법이나 적당히 물러날 때를 아는 법, 거짓말을 구분해 내는 법 같은 감정 혹은 인생의 기술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잘 생각해 보자.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분명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를 만난 건 외국인이 한국인보다 많은, 홍대의 어느 바에서였을 것이다. 뻔하디 뻔한 대화로 그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제가 술 한잔 사드려도 될까요?
아뇨, 저 이미 많이 마셔서..
제가 그럼 물 한잔 사드려도 될까요?
(생수병을 들어 보이며) 아뇨, 물도 있어서..
아.. 그럼.. 제가 마시는 거라도 봐주실 수 있나요..?
피식, 끈질긴데 제법 귀엽네? 그렇게 자리를 옮긴 바에서 제대로 얼굴을 마주 보는데 이럴 수가- 말도 안 되게 잘생겼다. 큰 키에 넓은 어깨, 스타일까지 좋다. 세상에, 내가 감히 이런 사람을 거절할 뻔했단 말야? 그의 끈기와 도전 정신에 감사하며 어디 사세요? 몇 살이에요? 별 의미도 없는 질문을 주고받는데 대체 뭐가 이렇게 재밌는지 입이 귀에 걸려 광대가 아플 지경이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거의 서로의 귀에 속삭이다시피 하며 힘겹게 이어진 대화는 두 시간이 지나도 끝날 줄을 몰랐다. 도중에 나를 찾아온 친구는 눈이 휘둥그레져 절대 놓치지 말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 날 번호를 교환하고 얼마 후 다시 만난 그는 밝은 조명에서 맨 정신으로 보아도 헉소리나게 멋있었다. 패션 잡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외모와 비율, 옷 입는 센스. 심지어 명문대생에 직장까지 좋았다. 술 대신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고 둘째가라면 서러운 금사빠인 나는 당연히 푹 빠져들었다.
그런데 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만날 수 있는 날이 정해져 있다든가, 갑자기 한참 동안 연락이 끊긴다거나, 은근슬쩍 개인적인 얘기를 피한다거나 등등. 두세 번쯤 만났을까, 그날도 늦게까지 차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는 나를 택시를 태워 배웅했다. 여전히 분위기는 더없이 좋다고 느꼈으나,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는지 그 이후로 눈에 띄게 연락은 줄었고 결국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내 인생 최고의 훈남- 아니 미남이었던지라 아쉬움도 큰만큼 한동안 속을 앓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수상한 구석이 많았다. 뭐 단순히 내가 마음에 안 들었거나 어장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왠지 유부남이었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가장 많이 들었던 것이다. 어차피 잘 안 될 인연이었고 진실은 영원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여하튼 그는 지금 얼굴도 이름도 까맣게 잊힌 짧디 짧은 인연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대체 그가 나한테 남긴 것이 무엇이냐고?
언젠가 그에게 글 쓰는 걸 좋아한다고, 지금은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언젠가는 꼭 작가가 될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뜬금없이 그에게 이런 카톡이 날아왔다.
브런치 어때?
..? 아점....?
ㅋㅋ아니 글 쓰는 브런치. 찾아봐봐.
그렇게, 나는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그래서 감히 말하고 싶다. 어느 누굴 만나 어떤 안 좋은 경험을 할지언정, 잘 찾아보면 나에게 남겨진 좋은 점 하나쯤은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 그 사람과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낭비였으며 더 일찍 깨닫지 못한 내가 어리석었음을 너무 후회하지도 자책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하나의 관문을 통과했을 뿐이며, 내 인생에 그 사람이 발자국을 찍어야 했던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그렇게 위안을 삼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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