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처럼 다시 해가 떴다
눈 온 뒤, 금세 녹아버린 낮을 바라보며
이정준
kwonho37@daum.net | 2019-08-08 20:51:33
[라이터스:하리하리 작가] 아침에 눈이 참 많이 왔다. 미세먼지 때문인지, 공기가 안 좋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서울에서 소복눈을 보기는 어려워졌다. 소복소복 쌓인 눈을 밟으며 걸어가면 느껴지는 특유의 질감 같은 게 있다. 느지막하게 일어나 바깥을 보니 우리 집 주변이 다 하얘서 좋았다. (저녁이 되니 매우 추웠지만)아까까지는 따스했다. 눈이란 존재가 차가움을 의미하는데, 그런 차가운 게 온 세상을 덮고 나서 오히려 포근함과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나는 약속 장소로 왔다. 사실 어제도 술을 엄청 먹고 싶었지만, 그 전 날 과음의 여파도 있고, 오후 2시에 약속이 있는 경우가 드물다 보니 음주를 자제한 것도 있었다.
일어난 것은 일렀지만, 계속 뒹굴대다 보니 약속 시간에 임박해서 집을 나왔다. 신기한 게 하나 있었다. 외출할 때가 되니 바깥이 밝아지는 것이었다. 아침에 잠시 줄넘기를 하러 나갔을 때는 새하얗던 동네가 낮이 되니 금세 녹아 버린 풍경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햇살을 받으며 약속 장소에 오니 이 동네, 안암은 이미 눈이 거진 다 녹아 있었다. 언제 눈이 왔었냐고 되묻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언제나 봄일 수는 없다. 봄~겨울의 사계절이 우리나라에 있듯이 우리의 관계에도 어느 순간 겨울은 찾아올 수 있다. 옛 선현들 보면 겨울에 찾아오는 보릿고개를 잘 넘겨 다시금 봄을 맞고, 가을에 수확의 기쁨을 누린다. 하지만, 그 혹한기를 버티지 못하면 그 관계는 끝나 버린다. 그렇게 이별은 찾아오는 것 같다. 처음에는 그 이별로 많이 아파한다. 너나, 나나. 그런데 그 이별의 아픔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물론 꽤 오래 가는 사람도 있다. 그 기간이야 사람마다 다르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 하나는 있다. 그 찬 바람이 쌩쌩 불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오늘 오후의 햇살처럼 그 자취를 감추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관계가 찾아오길 갈구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또 그 관계로 나는 아파하지 않을까 고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새로운 봄을 갈망한다. 사람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싶은 정도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봄을 원하는 마음은 매한가지로 갖고 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기 때문에 아픔이 흉터가 되고, 그 흉터마저 사라지고 나면 당연하게도 새살이 돋는다. 마음도 그렇다. 내 마음에도 새살이 돋으면 새로운 관계를 원하게 되는 것 같다.
다만, 또 다시 상처를 입을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은 있다. 상처가 주는 아픔을 나는 너무 생생하게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보고 싶은 곳이 있기도 하다. 무모한 걸 알면서도 다가가려고 한다. 그 관계가 깨지고 나서 아프다는 걸 알면서도, 아니 혹은 그 관계라는 배가 원더랜드에 도달하기도 전에 나를 두고 떠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에 타고 싶어 주위를 얼쩡거린다. 돈키호테도 그렇지 않았을까? 힘차게 돌아가는 풍차가 나를 공격할 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개의치 않아 한다. 혹시라도 그 풍차를 뚫고 원더랜드에 가게 되면 그만한 희열이 어디 있으랴? 그 희열을 느끼기 위해 위험 부담을 안고 길을 나선다.
내가 퇴사한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퇴사 후 삶이 위험 부담이 큰 것, 나도 잘 안다. 나에게는 갑옷과 말, 칼만 있을 뿐이다. 그 세 가지를 믿고 나서는 길이 절대로 평탄할 리 없다. 가다가 분명 나를 힘들게 하는 장애물들이 곳곳에 도사릴 게 뻔하다. 그러나 넓게 보면 인생 자체가 고된 것 아닌가? 인생의 고됨을 온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떤 시련에도 좌절할 수밖에 없다. 내가 택한 것은, 더더더 멀리 있는 희망을 상상하는 것이다. 희미한 희망을 상상하며 눈 오는 하루를 견디다 보면 그 눈도 나에게 따뜻하게 느껴질 것이고, 눈길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자세가 결국 사계절 내내 따뜻한 봄날만 있는 곳에 도착하도록 만들어 주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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