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한다'는 말이 주는 무게감
'이소라 - 그대가 이렇게 내맘에'를 듣다가 문득
이정준
kwonho37@daum.net | 2019-08-04 19:00:57
때에 따라서는 상대의 별것 아닌 말도 생각 이상으로 듣는 사람의 가슴을 파고든다.
미나토 가나에 [리버스] 中
열렬하게 진행되던 연애가 언제 그랬냐는 듯 허무하게 끝나 버리고 혼자 우두커니 세상에 서다 보니 문득 허무감이 물 밀 듯 밀려 왔다. 그 때만 해도 그 사람과 없으면 안 될 것처럼 성의껏 최선을 다했지만, 그 모든 노력이 작은 오솔바람에 모래성처럼 날아가 버린 상황은 내 힘을 빠지게 만들었다. 그럴 때는 꼭 동네 단골 카페에 가서 다크 초콜릿이 뿌려진 에스프레소, 더티 커피를 사 먹는다. 단맛과 쓴맛의 오묘한 조합이 꼭 나의 지난 사랑 같거든. 이별한 이에게도, 이별당한 이에게도 사랑이 지나간 자리는 화마가 할퀴고 간 상처처럼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아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과 다시 커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큼은 변함이 없다. 이별을 야기했던 그 상황은 또 다시 나를 찾아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설사 서로가 너무 좋아서 그것과 똑같은 상황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치자. 그 인위적 노력이 주는 고통도 상당할 거다. 난 그렇게까지 나를 변화시켜 가며 그 사람과 만나고 싶지는 않다. 뭐, 그 정도까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 후, 당연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자연스럽게 생각도 많아진다. 특히 사랑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 사회 진출도 좀 늦었고, 아직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긴 해도 이제 성인의 한복판을 달려가고 있는 만큼 사랑에 대한 생각은 해 볼 수 있다, 아니 이렇게 혼자 있을 때 미리 해야 진짜 나랑 맞는 사람이 누구인지 가려낼 수 있다고 본다. 뭐, 사랑의 귀결이 결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건 내가 아이들에게 취업을 바라보는 관점을 가르치는 것과 맥락이 비슷한데 대기업에 들어갔다고 내 인생 이제 쫙 편다~! 이런 건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결혼을 했다고 해서 그 상대가 어디도 절대 못 갈 나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이혼이 흠인 시대도 아니지 않는가? 법적 구속이 상대에게 무슨 짓거리를 해도 용서된다는 핑계를 제공하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결혼은 지나가는 사랑의 과정이지, 완성은 아니다.
자소서 쓸 때도 내가 아이들에게 말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내가 무엇을 잘 하는지, 어떤 특징이 있는지, 어떤 미래를 추구하는지 체크하라고 설파한다. 마찬가지다. 내가 추구하는 미래에 있어서 나의 평생의 동반자(혹은 될 지도 모르는 사람)가 나와 어떤 시너지를 낼지, 그리고 평소에 일상 생활에서도 함께 있을 때 그 사람이 나에게 (크든 작든 상관없다) 어떤 의미로 다가오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여기서 당연히 간과하지 말아야 할 조건 하나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미모를 최대한 가꿔 놓아야 한다. 이건 기본 중에 기본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내가 자신이 없는 것은, 이제 내가 누굴 '좋아한다'는 감정을 함부로 입밖으로 꺼내는 게 주저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전의 관계가 만들어졌던 과정을 돌이켜 보면, 참 여러 가지 단어들이 좋아한다는 단어와 동의어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연민, 동질감, 재미, 반대 등 사실 엄청나게 많은 연애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간의 연애 조각들을 꺼내 보면 그런 단어들이 좋아한다는 단어와 동일선상에서 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나이가 들고 나름대로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 이제는 잘 모르겠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누구에게 풀어놓으면 좋을지, 사랑한다는 거룩한 말은 더욱 꺼내기 어렵다. 나이 들며 상대에게 느끼는 감정의 무게가 무거워져서 그런가?
'소울메이트'의 추천으로 남자친구를 봤다. 어느 칼럼에서 봤지만, 박보검을 돈키호테로 묘사한다. 성에 갇힌 송혜교를 구해 주기 위해 그리고 자기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해 주기 위해 그는 돌진한다. 나는 그의 그런 용기가 감탄스러웠다. 사실 그들의 만남은 쿠바라는 특별한 공간이 만들어 준 낭만 때문에 더욱 의미가 짙어졌다. 그런 계기에서도 가슴 뜀을 느낀 박보검의 돌진은 그래서 감탄스러웠다. 엄밀히 말하면, 거절이 두려워서 그런 건 아니다. 거절로 가슴 아파 할 나이는 진작에 지났다. 다만, 좋아한다(더 나아가 사랑한다)라는 이 말이 무섭다. 글을 쓰는 일을 하면서 더욱 무서워진 걸 지도 모르겠다. 내가 뱉은 말이랑 내가 키보드에 꾹꾹 눌러담은 글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혹은 발행 버튼을 누르는 순간, 말을 듣는 이에게 혹은 이 브런치를 보는 익명의 누군가에게 전달될 수도 있다.
'그대가 이렇게 내 맘에'라는 곡은 어떤 노래보다도 낭만적이지만, 그 낭만적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노래를 듣는 내 맘은 ... 잘 모르겠다. 일단 나도 내 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 노래가 가슴을 설레게 만들지 못하는 거 같다. 그리고 그 나의 '그대'가 누가 될지 정확히 못 정하겠고, 사실 그 그대가 평생을 바쳐도 괜찮을 지 장담을 못하겠다. 어렸을 때, 그렇게 쿵쾅쿵쾅 상대를 향해 '진격의 거인'처럼 걸어가던 내 패기가 어떻게 그리 가능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대화란 것이 나의 마음을 좋게 한다는 것 자체가 주관적 생각들의 향연이다. 자기 소개서를 쓸 때만큼은 스스로를 믿으라고 하고, 나도 내가 글 쓰는 능력만큼은 굳게 믿는다. 그러나 그 외 분야, 누군가를 마음에 집어넣는 것은 단 1그램도 못 믿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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