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연 칼럼] 사랑받지 못하는 리더와 정량평가

한지원 기자

kanedu2024@gmail.com | 2024-11-30 10:48:51

▲ 사진=칸에듀케이션그룹 제공

 

중국에서 택시를 탔다. 몇 마디 대화 후 내가 한국인임을 눈치챈 기사가 대뜸 물었다. 한국 대통령들은 왜 모두 감옥에 가냐고.

 

부정할 수 없는 우스우면서도 슬픈 ‘웃픈’ 현실에 생각이 깊어졌다.

 

미국에는 워싱턴, 링컨, 루스벨트 같이 온 국민이 사랑으로 기억하는 대통령들이 있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또한 50% 넘는 지지율을 유지한 ‘사랑받는’ 대통령이었다. 영국의 처칠 같은 총리도 국민의 큰 사랑을 받은 리더로 회자된다.
 

왜 대한민국에는 사랑받는 리더가 없을까?
유일한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이유 중 하나는 대학의 인재 선발 방식에 있다. 우리의 대학 인재 선발 방식은 ‘정량평가’를 기본으로 한다. 즉 표준화된 시험을 통해 점수를 내고, 그 점수에 따라 줄 세워 학생을 선발한다.
 

문제는 표준화된 시험에 ‘리더십’이라는 평가 항목은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초중고 12년 기초교육 과정 동안 리더십을 배우는 대신 표준화된 시험 준비에 몰두하며 객관식 시험의 달인이 되는 연습을 하며 살아간다.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는 ‘공부’하기 위해 피아노와 그림을 내려놓는다.
 

학교에서의 반장, 학년 회장은 대학을 가기 위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스펙’ 한 줄일 뿐이다. 반장, 학년 회장, 전교 회장이 진정으로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는 없다. 선생님의 보조 교사 정도라고 보는 게 맞다.
 

▲ 사진=연합뉴스 제공

 

해외 교육 시스템은 어떠한가?
정량평가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량평가위원회의 심사에 심화한 정성평가를 얹어 평가를 진행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정량평가는 일차적인 심사에 불과하다. 일정한 점수를 갖추지 못한 학생은 2차 심사로 넘어가지 못한다. 2차 심사에서는 정성평가가 진행된다. 정량 점수는 더 이상 대학 합격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다. 한두 문제 더 맞고 덜 맞는지에 따라 당락이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성평가에서는 학생이 그동안 생활해 온 모습을 본다. 학생이 제출한 자기소개서, 선생님이 작성한 추천서 등 이 학생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전체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피아노를 좋아하는 아이는 어떻게 그 열정을 살려왔는지,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는 어떻게 그림을 더 잘 그리게 되었는지 보게 되는 것이다.
 

학생회장의 경우, 단순하게 학생회장을 역임하였다면 몇 점 추가해 주는 것으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학생회장으로서 학교와 학생들의 생활에 어떤 변화를 불러왔는지, 사례와 일화를 보고, 그 지원자의 역량을 판단한다.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입학사정관을 우리가 어떻게 믿는가?”, “정성평가를 하면 공정한가?” 등의 비판에 정치인들은 눈치를 보게 되고, 학교들은 용기를 내지 못하게 된다.
 

필자는 진정 용기를 내야 할 사람은 국민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앞날을 위해 결정해야 한다. 언제까지 ‘공정’이라는 미명 하에 감옥 갈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지도자가 되는 일을 반복해서 지켜볼 것인가? 우리는 어린 나이 때부터, 진정한 리더를 뽑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리더가 되는 법도 모르고, 진정한 리더를 알아보는 법도 모른다. ‘리더십’이라는 단어만 하더라도 그렇다. 지도력, 통솔력이라는 단어는 자리 잡지 못했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빌려서 ‘리더’를 표현하고 있다.

 

물론 ‘수시’라는 평가 제도가 있다.
다만 이 또한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제도가 아닌가. 학생들을 지켜본 선생님이 제출할 수 있는 평가는 고작 몇 자에 불과하고, 그나마 학생의 열정과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방과 후 활동이나 소논문 같은 경우에는 기재 자체에 불과하다.
 

‘공정’을 깨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더 ‘공정’해지자는 말이다.
‘공부만’ 잘하는 사람들이 좋은 대학에 가고, 지도자가 되는 것이 더 공정할까, 필자는 고민한다. 조금 성적이 부족하더라도, 남다른 열정, 남다른 통솔력이 있다면, 이런 사람들이 ‘공부’ 잘하는 사람들 속에서 더 성장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성장할 자극이 되어준다면, 더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대한민국이 되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점수로 보는 게 아닌,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더 공정한 제도가 아닐까?

 

▲ 사진=연합뉴스 제공

 

대학 인재 선발기준은 단순하게 대학의 문제가 아니다.

개개인에게는 인생이 달린 문제고, 국가에 있어서는 좋은 리더, 사랑받는 리더를 양성할 뿐 아니라, 그런 리더를 알아보는 눈을 키워가는 과정이다.
 

리더를 알아보는 눈을 갖게 되는 순간, 내 의견을 끝까지 고수한다고 해서 카리스마 있는 리더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리더는 국민에게 믿음을 주어야 하고, 국민들이 그 믿음을 바탕으로 당장 손해를 입는 것 같더라도 후에 더 큰 보상이 있을 것을 알고 따라 주어야 한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슬프게도 오늘날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리더의 말을 따름으로써 더 큰 보상이 따를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하루빨리 국민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랑받는’ 리더를 키워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그런 리더를 알아보는 눈을 키워내야 한다.

 

천하흥망, 필부유책이라 하였다.
우리의 흥망은 우리 손에 달려있다.
온 국민이 사랑해 줄 감옥 가지 않을 리더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 유호연
- 소셜밸류 발행인
- 칸에듀케이션그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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