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적'의 김지하 시인 별세...뛰어난 시 남겼지만 변절 논란도 불러와
김완묵 기자
kwmm3074@hanmail.net | 2022-05-09 05:34:37
[소셜밸류=김완묵 기자]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의 작품을 남긴 김지하(본명 김영일) 시인이 8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시인은 최근 1년여의 투병생활 끝에 이날 오후 4시께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타계했다고 토지문화재단 관계자가 전했다.
9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 관계자는 "시인과 함께 살고 있던 둘째아들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내외가 함께 임종을 지켰다"며 "상태가 안 좋아지셔서 119를 불렀지만 결국 별세하셨다"고 말했다.
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6년 서울대 미학과를 나와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 '비'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정식 등단했다. 이후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의 상징이자 민족문학 진영의 대표 문인으로 주목받았다.
1970년 국가 권력을 풍자한 시 '오적'으로 구속되는 필화를 겪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1980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1970년대 저항시를 발표했던 고인은 1980년대 이후 후천개벽의 생명사상을 정립하는 데 몰두했고, 1986년 '애린'을 기점으로 생명사상과 한국의 전통 사상 및 철학을 토대로 많은 시를 쏟아냈다.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경찰에 맞아 숨지고 이에 항의하는 분신자살이 잇따르자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칼럼을 기고해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다. 진보 진영에서는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의 구명운동을 계기로 만들어진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작가회의)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김 시인은 10년 뒤 '실천문학' 여름호 대담에서 칼럼과 관련해 해명하고 사과의 뜻을 표명했으나 2012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공개 지지하는가 하면 진보 문학평론가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노골적으로 매도하는 등 혼란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대표작으로는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애린' 등의 시집과 산문집 '생명' '율려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2018년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마지막으로 절필 선언을 했다.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과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과 브루노 크라이스키상, 만해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노벨문학상·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다.
1973년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 씨와 결혼했으며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던 김씨는 지난 2019년 세상을 떠났다. 유족으로는 아들인 김원보 작가,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등이 있다.
김지하 시인의 빈소는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1일이다. 장지는 부인이 묻힌 원주 흥업면 선영이다.
한편 김지하 시인의 별세 소식에 고인과 인연이 있던 문학계 인사들은 "저항의 시인에서 생명 사상가로 지평을 열어간 분"이라고 기억했다. 1970년대 반독재 투쟁을 벌였던 김 시인이 1980년대 이후 생명 사상에 심취했고, 일련의 행보로 '변절'이란 비판을 받으면서 문단에서 소외된 측면이 있다고 돌아보기도 했다.
2015년 고인과 함께 '김지하 평론선집'을 출간했던 홍용희 문학평론가는 "초기의 시 세계는 '오적'과 '타는 목마름으로' 등 어둠의 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에 해당한다면, 1980년대 시집 '애린'을 기점으로 어둠의 세력까지 순치시켜 포괄해내는 '살림'의 문화, 생명의 문명을 재건하는 문학과 사상의 세계를 열어갔다"고 말했다.
홍 평론가는 "특히 우리의 전통, 문화, 사상, 철학을 토대로 서양의 미래학과 철학 등에도 관심을 뒀다"며 "지구가 처한 생명파괴 현실에 대한 새로운 출구를 찾는 일에 몰두했다"고 덧붙였다.
1991년 조선일보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와 2012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 지지 등으로 진보 진영에서 비판을 받은 것과 관련해선 "김 선생은 촛불시위의 촛불도 ('오적'의) 민초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온 것이라 생각했다"며 "변절보다는 직접적인 부정과 투쟁에서, 포용하는 '살림'의 문화로 나아간 사상의 맥락에서 봐야 한다"고 짚었다.
정과리 평론가는 "한국 문학사와 사상사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라며 "4·19 세대인 김 시인은 국가권력자를 비판하고 풍자한 '오적'이란 시를 통해 문학이 또 하나의 공적 영역이란 걸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오랫동안 영어의 몸이었지만 문학이 일종의 자유를 실천하는 작업이란 점 등 초기 4·19 정신의 최첨단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또 "김 시인은 감옥 안에서 민들레가 피어나는 걸 보고 생명의 소중함과 신비를 발견했다고 한다"며 "민주화의 움직임이 민족주의로 기울 때, 생명사상의 행보를 보이며 민중문학과 거리를 둬 문단에서 소외된 측면이 있다. 지적 동반자를 찾기 어려워 은둔하다시피 했다"고 덧붙였다.
2018년 7월 고인의 생전 마지막 책을 펴낸 도서출판 작가의 손정순 대표는 "등단 50주년 기념 시집과 산문집이 마지막 저서가 될 거로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20여 년 전부터 김지하를 연구해온 문인과 학자 10명가량이 선생님의 문학 작품을 평가하는 책을 내기 위해 준비했었다"며 "선생님에 대한 추모의 성격이 담긴 새 책을 올해 안에 낼 것"이라고 전했다.
류근 시인은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1970~80년대 그 피바람 부는 시대에 그의 시는 그대로 구원이고 위안이었다"며 "진영 논리 따위는 모르겠다. 탁월한 서정 시인으로 기억한다"며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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